주시경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말 문법의 비밀
1. 문법은 우리말 세계를 보여주는 지도
이 책은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국어 문법을 100년 전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님이 현대의 청소년들(세영, 세운)에게 직접 강의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자 최경봉 교수는 문법을 단순한 규칙의 나열이 아니라, 우리말이라는 세계를 탐험하는 '지도'로 정의합니다. 주시경 선생님은 자신이 우리말을 연구하며 겪었던 고민과 시행착오, 그리고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문법의 원리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1부: 우리말의 세계 - 언어와 정신, 그리고 표기
제1강: 우리말에서 우리의 얼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언어와 사고의 관계: 주시경은 "말은 그 말을 사용하는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훔볼트의 언어관을 소개합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었습니다.
어휘장(Word Field)과 사고방식: 언어마다 세상을 인식하고 나누는 방식(어휘장)이 다릅니다.
가족 관계: 우리말은 '형, 오빠, 누나, 언니' 등으로 분화되지만 영어는 'brother, sister'로 단순화됩니다.
요리 어휘: 우리말은 물을 이용한 요리법(끓이다, 삶다, 데치다, 고다 등)이 발달한 반면, 영어는 불을 이용한 굽기(grill, roast, bake 등)가 발달했습니다.
결론: 말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반영합니다.
제2강: 우리말을 잘하면 외국어도 잘할까?
비교와 대조의 힘: 주시경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과 영어를 배우며 우리말 문법 체계를 세울 계획을 했습니다 . 그는 영어 문법과 우리말을 비교(대조)하며 우리말의 특성을 파악했습니다.
유길준과 김규식의 연구: 유길준은 『대한문전』을, 김규식은 영문법을 토대로 우리말의 특징(조사와 어미의 발달 등)을 미국 학회지에 소개했습니다.
학습 원리: 외국어 문법을 배울 때 우리말 문법과 비교하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하면 두 언어 실력 모두 향상될 수 있습니다.
제3강: 한글 맞춤법은 왜 어려울까?
소리 vs 형태: 한글 맞춤법의 핵심 갈등은 '소리대로 적을 것인가(음소주의)' 아니면 '원래 형태를 밝혀 적을 것인가(형태주의)'에 있습니다.
주시경의 선택: 주시경은 뜻을 파악하기 쉽도록 형태주의 표기법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꽃이, 꽃을'로 적어야 '꽃'이라는 의미가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훈민정음』의 재발견: 주시경은 『훈민정음』을 통해 종성(받침)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원리를 확인하고, 자신의 형태주의 이론을 확립했습니다.
현행 맞춤법: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현행 규정은 주시경의 형태주의를 뼈대로 하되 소리대로 적는 관습을 일부 인정한 절충안입니다.
제4강: 말은 변하는 것이 좋을까, 변하지 않는 것이 좋을까?
언어의 역사성: 모든 만물이 변하듯 언어도 변합니다. 예를 들어 '가시(아내)' 같은 말은 사라졌습니다.
규범의 필요성: 말이 너무 빠르게 변하면 소통이 어렵습니다. 주시경은 사전과 문법을 통해 말의 변화를 늦추고 통일성을 유지하여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고자 했습니다.
복수 표준어: 하지만 현실 언어와 규범의 괴리가 커지면 규범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장면'과 '짜장면'을 모두 표준어로 인정한 것이 그 예입니다.
제5강: 좋은 말과 나쁜 말은 타고난 것일까?
표준어와 비속어의 경계: '가야고'가 표준이었다가 '가야금'으로 바뀌었듯, 좋은 말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관용어의 탄생: '미역국을 먹다', '산통을 깨다' 같은 관용어도 처음에는 속된 표현이었으나 널리 쓰이면서 정착되었습니다.
신조어의 운명: '얼짱', '멘붕' 같은 신조어는 언어의 생명력을 보여주며, 사회의 가치관 변화를 반영합니다.
2부: 문법의 세계 - 단어, 문장, 그리고 소리의 법칙
제6강: 문법은 왜 배우는 걸까?
언문일치와 문법: 말하는 대로 글을 쓰는 '언문일치' 시대에는 말의 규칙(문법)을 정립해야 글을 통해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글쓰기: 문법은 문장을 구성하는 법칙입니다. 품사와 문장 성분의 기능을 알면 내 생각을 정확하고 논리적인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문법 공부는 결국 독서와 작문 능력 향상으로 이어집니다.
제7강: 품사를 구분하는 일은 너무 어려워
형용사의 딜레마: 주시경은 동사와 형용사 구분, 특히 관형사형 어미가 붙은 '먹는(동사)'과 '예쁜(형용사)'을 구분하는 데 큰 고민을 했습니다. 초기에는 영어의 분사 개념을 빌려 형용사의 범위를 넓게 잡기도 했습니다.
주시경의 품사 분류 변천:
초기: 우리말 용어를 만들어 사용 (임-명사, 엇-형용사, 움-동사 등).
변화: '크다, 큰, 크게'를 모두 형용사로 보거나, '이, 그, 저'를 명사로 보는 등 기능과 형태 불변성에 주목하여 분류 기준을 계속 수정했습니다.
핵심 교훈: 품사는 언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분류 도구일 뿐 절대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분류 기준(형태, 기능, 의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8강: 문장에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담길까?
문장 성분: 주어, 서술어, 목적어 등 문장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주시경은 서술어의 의미가 문장의 구조(목적어 필요 여부 등)를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보어의 문제: '되다, 아니다' 앞의 말을 보어로 보는 학교 문법과 달리, 주시경은 이를 부사어의 일종으로 보거나 서술어의 일부로 파악하는 등 다양한 고민을 했습니다.
문장의 확대: 홑문장이 모여 겹문장이 되면 더 복잡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때 안긴 문장(절)은 문장 속에서 하나의 성분 역할을 합니다.
제9강: 조사와 어미는 우리말 문장의 핵심 고리
교착어의 특징: 우리말은 실질 형태소에 조사나 어미가 붙어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는 교착어입니다 . 김규식은 이를 "한국어 문법의 핵심은 어미(조사 포함)의 변화"라고 설명했습니다.
주시경의 독창적 분류: 주시경은 조사와 어미를 독립된 단어(품사)로 보았습니다.
것: 조사 (예: 은, 는, 이, 가)
잇: 접속 조사 및 연결 어미 (예: -고, 와/과)
끗: 종결 어미 (예: -다, -냐)
어울림의 미학: 조사와 어미는 결합하는 말에 따라 제약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도'를 나타내는 '-러'는 이동 동사(가다/오다)와만 어울립니다.
제10강: 말은 쪼갤 수 없을 때까지 쪼개 봐야 안다고?
형태소의 발견: 주시경은 말을 의미를 가진 최소 단위까지 분석하려 했고, 이를 '늣씨'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현대 언어학의 형태소(morpheme) 개념과 일치하며, 블룸필드보다 앞선 선구적 연구였습니다.
분석의 실제:
'집에 가니' → 집(명사) + 에(조사) + 가(동사 어간) + 니(어미)
'걱정스럽지' → 걱정(어근) + 스럽(접사) + 지(어미)
제11강: 단어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합성어의 원리: 기존 단어들을 결합해 새 단어를 만듭니다. (예: 눈+물=눈물, 기+차=기차) . 우리말 합성어는 '작은아버지'처럼 수식어가 앞에 오는 구조적 특징이 있습니다.
파생어: 접두사나 접미사가 붙어 새로운 뜻을 더하거나 품사를 바꿉니다. (예: 맨-손, 높-이)
전성 어미와 파생의 경계: 주시경은 '높은(관형사형)', '먹기(명사형)' 등을 새로운 품사로 파생된 것으로 보았으나, 현대 문법은 이를 활용(어미 변화)으로 봅니다.
제12강: 소리를 실은 문자의 운명은?
아래아(ㆍ)의 소실: 주시경은 당시 혼란스럽게 쓰이던 아래아의 음가를 'ㅏ'와 'ㅡ'의 합음 등으로 규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언어 대중의 소리 감각에서 아래아가 사라지면서 결국 표기법에서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소리의 변화: 장단음(눈[설] vs 눈:[목])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에'와 '애'의 발음 구분이 어려워지는 현상은 언어가 계속 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13강: 소리와 소리가 마주치면 소리가 변한다?
음운 변동의 원리: 형태를 고정해서 적더라도 발음은 편의성에 따라 변합니다.
교체(동화): '국물' → [궁물] (파열음 ㄱ이 비음 ㅁ 앞에서 비음 ㅇ으로 변함)
축약: '막히다' → [마키다] (ㄱ+ㅎ=ㅋ)
탈락/끝소리 규칙: '맡고' → [맏꼬] (ㅌ이 ㄷ으로 발음)
과학적 설명: 이러한 변동은 조음 위치(소리 나는 곳)와 조음 방법(소리 내는 법)의 상호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3부: 사전의 세계 - 지식의 보고, 말모이
제14강: 사전은 어디에 쓰지?
종합 정보 창고: 국어사전은 단순한 뜻풀이뿐만 아니라 발음, 품사, 활용형, 문형 정보(필요한 문장 성분), 유의어/반의어, 어원 등 풍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글쓰기의 도구: 정확한 단어 선택(예: 빌리다 vs 빌다, 염두하다(X)→염두에 두다(O))과 문맥에 맞는 유의어 선택(파장 vs 반향)을 도와주어 글쓰기 실력을 높여줍니다.
제15강: 어떤 사전이 좋은 사전일까?
표준의 제시: 주시경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사전과 달리, 우리말의 표준을 확립하기 위해 독자적인 사전 『말모이』를 기획했습니다.
좋은 뜻풀이: 단어의 미묘한 의미 차이를 구분하고(다의어), 용례를 통해 실제 쓰임을 보여주는 사전이 좋은 사전입니다.
제16강: 사전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편찬 과정)
어휘 수집: 책, 신문, 잡지 등에서 광범위하게 어휘를 수집합니다 .
카드 작성: 수집한 어휘를 개별 카드에 기록하고 가나다순으로 정리합니다. 주시경은 약 10만 장의 카드를 작성했습니다.
뜻풀이 및 집필: 어휘의 의미를 정의하고 적절한 용례를 덧붙입니다.
교정 및 편집: 원고를 정리하며 새로운 말을 추가하거나 삭제하고, 오탈자를 잡습니다.
출판: 『말모이』는 원고 단계에서 멈췄지만, 그 정신은 제자들의 『조선어 큰 사전』으로 이어져 결실을 맺었습니다.
주시경 선생님의 당부
주시경 선생님은 우리말 연구가 "심각한 의무감"이 아니라 "분석하고 체계를 세우는 즐거움"이 되기를 당부합니다. 우리말로 슬픔과 기쁨, 희망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을 즐기며 우리말을 탐구하라고 조언하며 강의를 마칩니다.
[서평] 우리말의 '뼈대'와 '정신'을 찾아 떠나는 시간 여행
1. 왜 지금 '주시경'인가?
우리는 매일 한국어를 사용하지만, 정작 그 작동 원리인 '문법' 앞에서는 작아진다. 학교 문법 시간은 암기해야 할 규칙들의 나열로 느껴지고, 맞춤법은 까다로운 규제로만 다가온다. 최경봉 교수의 『교양 있는 10대를 위한 우리말 문법 이야기』는 이러한 문법 공포증을 치유하기 위해 100년 전의 인물, 주시경을 소환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문법을 '외워야 할 규칙'이 아니라 '만들어진 과정'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주시경이라는 화자는 자신이 우리말을 연구하며 부딪혔던 난관들—형용사를 동사와 어떻게 구분할지, 조사를 단어로 볼지 말지, 아래아(ㆍ)를 어떻게 처리할지—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독자는 완성된 지식이 아니라, 지식이 형성되는 역동적인 현장에 초대받는다. 이는 문법이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언어 현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학자들의 치열한 고민의 산물임을 깨닫게 해준다.
2. 문법, 우리 민족의 얼과 논리
책의 전반부는 언어와 민족의 관계를 조명한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주시경에게 국어 연구는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사라질 위기에 처한 '민족의 얼'을 지키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맹목적인 민족주의에 매몰되지 않는다. 언어가 사고방식을 반영한다는 '언어 상대성 이론'을 가족 관계 호칭이나 요리 용어의 비교를 통해 흥미롭게 풀어낸다. 이는 우리말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환경에 최적화된 고유한 그릇이기에 소중하다는 합리적인 결론으로 이끈다.
3. 분석의 즐거움: 늣씨(형태소)와 품사
이 책의 백미는 문법의 핵심인 형태소와 품사를 다루는 부분이다. 주시경은 '늣씨'라는 독창적인 용어로 형태소의 개념을 설명한다. 말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까지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언어 분석의 지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특히 품사 분류 과정에서 주시경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현대 학교 문법과 주시경 문법의 차이를 비교하며 설명하는 방식은, 입시 문법에 익숙한 청소년들에게 문법 현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여 메타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4. 사전, 미완의 꿈에서 완성으로
책의 후반부는 사전 편찬의 역사를 다룬다. 주시경의 미완성 원고 『말모이』가 제자들을 통해 『조선어 큰 사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이다. 가난 속에서 수만 장의 어휘 카드를 작성하고,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우리말을 채록하려 했던 노력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국어사전이 단순한 단어 검색기가 아니라 글쓰기의 강력한 도구임을 역설한다. 유의어의 미세한 뉘앙스 차이를 구분하고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는 힘이 바로 사전에서 나온다는 실용적인 조언은 글쓰기를 고민하는 10대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5. 문법, 두려움에서 호기심으로
이 책은 제목처럼 '교양 있는 10대'를 위한 책이지만, 우리말의 원리를 잊고 지내는 성인들에게도 훌륭한 재교육서다. 주시경 선생님의 입을 빌려 전개되는 16강의 강의는 친절하고 유머러스하며 깊이가 있다.
책을 덮고 나면, 무심코 내뱉던 단어 하나, 조사 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눈물'이라는 단어 속에 숨겨진 합성의 원리가 보이고, '밥을 먹는다'와 '밥이 맛있다'의 조사 차이가 선명해진다. 문법 공부가 '부담스러운 짐'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지도'가 될 수 있음을, 이 책은 증명해 냈다. 우리말의 뿌리를 이해하고 더 정확하고 풍요로운 언어생활을 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