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2: 1차 십자군 전쟁과 보에몽의 야망
1. 서구가 왜곡한 '중동'의 역사와 오리엔탈리즘
이 책은 본격적인 십자군 전쟁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가 흔히 '중동'이라 부르는 지역의 역사가 서구의 시각으로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짚고 넘어갑니다. 저자는 이집트와 페르시아(이란)의 찬란했던 문명을 소개하며, 서구 중심의 역사관인 오리엔탈리즘을 경계합니다.
문명의 기원 논쟁: 19세기 서구 학자들은 이집트의 거대한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를 보며 "백인이 와서 가르쳐준 문명일 것"이라거나 심지어 "외계인의 소행"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 이는 유색인종이 독자적으로 훌륭한 문명을 건설할 능력이 없다는 인종차별적 편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재발견: 서구 역사에서 페르시아(이란)는 늘 '악당'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 속의 키로스 대왕이나 다레이오스 1세는 정복지에 관용을 베푸는 훌륭한 통치자였습니다
. 특히 키로스 대왕은 바빌론 유수에서 유대인을 해방시킨 '메시아'적 존재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실체: 영화 <300> 등으로 알려진 페르시아 전쟁 역시 '자유를 사랑하는 그리스' 대 '야만적인 페르시아'의 대결이 아니라, 당시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전쟁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조차 페르시아 용병으로 활동하는 등 양측의 교류는 활발했습니다.
헬레니즘의 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전개된 헬레니즘 시대 역시, 서구 문명의 전파라는 미명 아래 동방의 문화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억지로 그리스화를 강요했던 문화 제국주의적 측면이 존재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 십자군 전쟁 역시 '성전(Holy War)'이 아니라 서구의 탐욕과 편견이 빚어낸 야만적인 침략 전쟁이었음을 시사하며 1차 십자군 이야기의 문을 엽니다.
2. 보에몽이 온다: 1차 십자군과 비잔티움 제국의 위기
1차 십자군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자,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보에몽(Bohemond)은 서방 기독교 세계의 영웅이 아닌, 탐욕스러운 정복자로 등장합니다.
보에몽의 출신: 보에몽은 북유럽 바이킹(노르만족)의 후예로, 이탈리아 남부에 정착한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들입니다
. 그는 아버지와 함께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하여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적이 있는 인물입니다. 알렉시오스 황제의 딜레마: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튀르크족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서방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정작 도착한 것은 옛 적수 보에몽과 통제 불능의 십자군이었습니다
. 황제는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정복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반환한다"는 충성 서약을 받아내며 간신히 통제권을 행사하려 합니다. 니케아 공방전과 도릴레온 전투: 십자군은 니케아를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만, 알렉시오스 황제가 투르크인들을 보호하며 평화적으로 도시를 접수하자 약탈 기회를 잃은 것에 불만을 품습니다
. 이후 도릴레온 전투에서 십자군은 튀르크군의 기습으로 전멸 위기에 처하지만, 중무장 기병대의 돌격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진격합니다.
3. 안티오키아 공방전: 지옥이 된 성지
1차 십자군 전쟁의 최대 격전지이자, 인간의 바닥을 보여주는 참혹한 현장은 바로 안티오키아였습니다.
8개월간의 지옥: 십자군은 난공불락의 요새 안티오키아를 포위했지만, 보급 부족으로 극심한 기근에 시달립니다. 말 가죽과 썩은 고기를 먹는 것은 예사였고,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수많은 병사가 죽거나 탈영했습니다.
보에몽의 계략과 배신: 보에몽은 안티오키아를 자신이 차지하기 위해, 동로마 황제와의 약속을 어길 명분을 찾습니다. 그는 성내의 배신자(피루즈)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게 만들고, 다른 십자군 지휘관들에게 안티오키아의 소유권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강요합니다.
식인(Cannibalism)의 참상: 안티오키아 점령 후 주변 도시인 '마라트안누만'을 공격했을 때, 십자군은 극심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이교도 성인들을 삶아 먹고 아이들을 구워 먹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는 단순한 기근 때문이 아니라, 적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광신적인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4. 롱기누스의 창: 기적을 가장한 사기극?
안티오키아를 점령하자마자 십자군은 카르부카가 이끄는 이슬람 대군에게 역포위를 당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성창(롱기누스의 창)'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은자 피에르의 재등장: 군중 십자군을 이끌다 실패했던 은자 피에르(혹은 피에르 바르톨로메오)가 안티오키아 대성당 지하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옆구리를 찔렀다는 '성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합니다.
기적과 승리: 녹슨 쇠붙이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이 창은 십자군에게 광적인 사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성창을 앞세운 십자군은 성문을 열고 나가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카르부카의 군대를 격파합니다.
진위 논란과 불의 심판: 그러나 성창의 진위에 대한 의심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피에르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불타는 장작더미 사이를 걸어가는 '신명 재판(불의 심판)'을 자청합니다
. 그는 불길 속을 걸어 나왔으나 심각한 화상을 입고 며칠 뒤 사망하며, 성창은 가짜라는 여론이 형성됩니다. 하지만 보에몽은 이미 이 '기적'을 이용해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영지로 확고히 한 뒤였습니다.
5. 예루살렘 정복과 대학살
보에몽이 안티오키아에 눌러앉은 사이, 나머지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합니다.
피로 씻긴 성지: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을 넘습니다. 그들은 "이교도의 피로 성지를 씻어낸다"는 명분 아래 무슬림과 유대인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합니다. 예루살렘의 거리는 발목까지 피가 차올랐다고 전해집니다.
고드프루아의 등극: 정복된 예루살렘의 통치자로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선출됩니다. 그는 겸손하게 '왕' 대신 '성묘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만, 이는 십자군 내부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기도 했습니다.
6. 보에몽의 몰락과 최후
안티오키아의 군주가 된 보에몽은 자신의 야망을 멈추지 않았지만, 운명(포르투나)과 자신의 오만(히브리스)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포로가 된 보에몽: 보에몽은 영토 확장을 위해 북진하다가 다니슈멘드 투르크군에게 생포되어 3년이나 감옥 살이를 합니다. 조카인 탕크레드가 그의 석방 협상을 방해하는 등 내부의 배신도 겪습니다
. 하란 전투의 패배: 석방된 후 1104년 하란 전투에서 무슬림 연합군에게 대패하며 보에몽의 위세는 꺾입니다.
관 속의 탈출과 최후의 발악: 위기에 몰린 보에몽은 죽은 척 위장하여 썩은 닭과 함께 관 속에 들어가 동로마의 봉쇄망을 뚫고 유럽으로 탈출합니다. 그는 프랑스 왕의 딸과 결혼하며 재기를 노리고 동로마 제국을 다시 침공하지만(두라초 공방전), 결국 알렉시오스 황제에게 패배하여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서평] 십자군 전쟁, 신의 뜻인가 탐욕의 광기인가?
1. 역사는 반복된다: 11세기의 십자군과 21세기의 전쟁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 2》는 단순한 역사 만화가 아니다. 11세기 말 중동을 휩쓸었던 십자군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는 21세기의 현실, 특히 이라크 전쟁과 같은 서구의 중동 개입을 떠올리게 된다. 작가는 "역사의 기억을 조직하여 현재를 고발한다"는 추천사처럼, 과거의 사건을 통해 현대의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책은 끊임없이 묻는다. "과연 그 전쟁은 정의로웠는가?" 십자군은 '신의 뜻(Deus Vult)'을 외치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것은 신앙심보다는 약탈과 정복욕, 그리고 타문화에 대한 혐오였다. 이는 대량살상무기(WMD) 제거와 민주주의 전파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석유 이권과 패권 유지에 있었던 현대의 전쟁들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다.
2. 보에몽: 탐욕스러운 영웅의 초상
2권의 중심인물인 보에몽은 십자군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그는 뛰어난 무장이자 지략가였지만, 신앙심보다는 자신의 영지를 넓히는 데 혈안이 된 인물이다. 동로마 황제와의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안티오키아를 차지하기 위해 동료들을 볼모로 잡고 시간을 끌며, 심지어 적의 첩자를 잡아먹는다는 식인 소문을 퍼뜨려 공포를 조장한다.
작가는 보에몽을 단순한 악당으로 그리지 않고, '매력적이지만 위험한', 그리고 '능력 있지만 오만한(Hubris)' 인물로 묘사한다. 그는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적 인물의 전형이며, 오늘날 국제 정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국익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강대국의 지도자들을 연상시킨다. 보에몽의 흥망성쇠는 힘의 논리만을 맹신하는 자가 맞이하게 될 필연적인 파국을 경고하는 듯하다.
3. '식인(Cannibalism)'의 충격과 서구 중심 역사관의 해체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마라트안누만에서 벌어진 십자군의 식인 행위 묘사다. 작가는 서방 측 연대기의 기록을 인용하여, 십자군이 이교도 성인을 삶아 먹고 아이들을 구워 먹었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는 우리가 흔히 '기사도'나 '성전'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온 십자군의 실체가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이러한 묘사를 통해 "누가 문명이고 누가 야만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서구는 오랫동안 동방을 미개하고 야만적인 곳으로 규정해왔지만(오리엔탈리즘), 정작 역사 속에서 가장 끔찍한 야만성을 드러낸 것은 문명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십자군이었다. 이 책은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해체하고, 피해자의 관점, 즉 짓밟힌 중동 민중의 시선에서 전쟁을 바라보게 만든다.
4. 만화라는 형식이 주는 힘과 재미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는 결코 지루하지 않다. 작가 특유의 로마네스크 양식 그림체는 중세의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유머와 패러디(휴대폰, 인터넷 댓글, 뉴스 속보 등)를 절묘하게 배합하여 독자들이 역사에 쉽게 몰입할 수 있게 한다.
특히 각 장의 끝에 배치된 '고전 읽기' 코너(투키디데스의 멜로스 대화, 플라톤의 국가 등)는 만화에서 다룬 사건들을 철학적인 깊이로 확장시켜 준다. 힘이 곧 정의라는 논리에 맞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이 장치들은 이 책을 단순한 교양 만화를 넘어선 인문학 서적으로 격상시킨다.
5.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2》는 1차 십자군 전쟁의 전개 과정을 상세하게 다루면서도, 그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탐욕과 광기, 그리고 전쟁의 비극을 놓치지 않는다. 이 책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 사회, 그리고 여전히 종교와 이념의 갈등으로 고통받는 세계 정세 속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관용'과 '공존'의 가치를 역설한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싶은 독자, 서구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싶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보에몽의 오만과 십자군의 광기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지 고민해볼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