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의 영성』: 시니어를 위한 영성, 관계, 부르심, 지혜의 완성을 향하여
1.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여는 열쇠
이 책은 인생의 후반전을 맞이하는 중년과 노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이듦'이 단순한 쇠락이 아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영적 순례임을 역설합니다. 저자 조장호 목사는 성서유니온의 『시니어 매일성경』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성경 속 인물들의 노년과 그들의 영적 여정을 통해 현대의 시니어들이 겪는 상실감, 후회, 두려움을 복음 안에서 재해석합니다. 인생은 연습 없이 사는 '가 보지 않은 길'이기에, 믿음의 선조들이 보여준 발자취를 따라가는 지혜가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2. 영성: 연약함 속에서 피어나는 믿음의 깊이
믿음 없는 자의 믿음: 겨자씨 한 알의 기적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깨닫게 됩니다.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모순투성이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겨자씨'만 한 믿음, 혹은 '무순' 같이 연약한 믿음이라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매달리는 그 절박함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작다고 내치지 않으시고, 그 연약함을 통해 오히려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은혜의 크기: 부스러기가 아닌 넘치는 은혜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가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고백하며 낮아졌습니다. 이는 자존심을 버린 비굴함이 아니라, 크신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져도 좋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작게 여길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크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스러기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넘치도록 채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나이듦의 과정에서 우리는 낮아짐을 경험하지만, 그 낮은 자리야말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담는 그릇이 됩니다.
기도로 살다: 내 힘을 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
모세는 40세에 자기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려다 실패하고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80세가 되어서야 그는 지팡이 하나를 의지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여호수아의 칼이 아니라 산 위에서 손을 든 모세의 기도였습니다. 노년의 영성은 '내 힘'을 빼고 '기도의 손'을 드는 것입니다. 젊은 날의 혈기와 성취욕을 내려놓고, 승리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며 기도로 사는 삶, 이것이 인생의 광야를 통과하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감: 멈추지 않는 배움의 여정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시며 당신의 비밀을 공유하셨습니다. 노년에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배움은 멈추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중보하며 하나님의 의와 자비를 깊이 알아갔듯이, 우리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갑니다. 세상의 지식은 사라질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원하며 우리의 구원을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3. 관계: 화해와 용서로 맺는 인생의 열매
인생의 아이러니: 낮은 자를 통해 오는 구원
나아만 장군은 자신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 적국의 포로였던 어린 여종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또한 엘리사 앞에서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요단강에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인생의 위기에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무시했던 작고 낮은 자들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여십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을 내려놓고, 주변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 야곱의 변화
야곱은 평생 사람과 씨름하며 복을 쟁취하려 했으나,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이는 더 이상 사람을 붙들지 말고 하나님을 붙들고 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될 때, 깨어졌던 형 에서와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진정한 관계의 회복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환도뼈가 위골되는 아픔, 즉 자아가 깨어지는 경험을 통해 주어집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용서와 인정의 힘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아들을 잃고 통곡했습니다. 반면 탕자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제일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노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인정과 용서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빚을 진 자로서 가족과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용서를 구하며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낯선 얼굴의 헤세드: 룻과 나오미
모든 것을 잃고 돌아온 나오미에게 하나님은 이방 여인 룻을 통해 변함없는 사랑(헤세드)을 보여주셨습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낯선 이방인이었지만, 그를 통해 다윗의 가문이 이어지고 메시아의 족보가 형성되었습니다. 우리 곁에 있는 낯선 이들, 때로는 부담스러운 이웃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통로일 수 있습니다. 그들을 환대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노년은 외롭지 않고 풍성해집니다.
4. 부르심: 은퇴 없는 사명자의 삶
복이 되는 인생: 아브라함의 소명
하나님은 75세의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소유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나이가 들어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이 줄어들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영적인 복을 나누어 주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믿고, 이웃을 위해 중보하며 축복하는 삶이 바로 노년의 부르심입니다.
세상 속의 제사장들: 일상의 거룩함
루터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은퇴 후에도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손주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할머니, 이웃을 위해 옷을 짓는 다비다처럼, 일상의 작은 섬김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한 제사장의 사역입니다. 제사장의 흉패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듯, 우리는 이웃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그들의 짐을 나누어 져야 합니다.
늦게 깨달은 부르심: 존재의 목적 재발견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걸작품)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젊은 날에는 성취와 성공을 좇느라 이 부르심을 잊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전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 일을 행할 기회입니다. 나의 유익이 아닌 타인의 유익을 구하고, 깨끗한 질그릇처럼 자신을 비워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자로 준비되는 것이 늦게라도 깨달아야 할 소명입니다.
미완의 미학: 모세의 느보산
모세는 평생의 염원이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미완'의 인생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순종의 마무리였습니다. 우리 인생의 과업이 다 완성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님이 채우시고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시 90:17)라는 모세의 기도는 미완의 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겸손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5. 지혜: 아름다운 마침을 위한 준비
지혜자의 길: 솔로몬의 전도서
솔로몬은 젊은 날 지혜를 구했지만, 말년에는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여 실족했습니다. 그는 전도서를 통해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참된 지혜임을 역설합니다. 노년의 지혜는 대단한 업적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늘 하나님이 주신 소소한 즐거움(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 등)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후반전: 갈렙의 산지
갈렙은 85세의 나이에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육신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인생의 후반전은 이력서(Resume)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추도문(Eulogy)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성공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위해 싸우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그네 길의 지혜: 야곱의 고백
야곱은 바로 앞에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인생이 정처 없는 방랑이 아니라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길임을 깨달은 자의 고백입니다. 그는 젊은 날 복을 움켜쥐려 했으나, 노년에는 손을 펴서 바로를 축복하고 자손들의 미래를 예언합니다. 움켜쥔 손을 펴서 나누고 베푸는 것이 나그네 길을 걷는 성도의 지혜입니다.
아름다운 마침: 시므온의 찬송
시므온은 죽기 전 그리스도를 보기 원했고, 마침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찬송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평안히 놓아주시는' 해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소망이 있기에 죽음을 담담히 준비할 수 있습니다. 잘 사는 것(Well-being)만큼이나 잘 죽는 것(Well-dying)이 중요합니다. 믿음 안에서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는 것이야말로 노년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서평] 나이듦, 상실이 아닌 충만을 향한 거룩한 여정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는가?"
조장호 목사의 『나이듦의 영성』은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우리 시대에, 특히 신앙인들이 마주해야 할 '나이듦'의 의미를 성경적 통찰로 풀어낸 수작이다. 저자는 노년을 단순히 육체적 기능이 소실되고 사회적 역할이 축소되는 상실의 시기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적 완숙함에 이르는 기회이자, 미완의 인생을 은혜로 완성해가는 거룩한 과정으로 재정의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정직한 대면'과 '따뜻한 위로'의 균형에 있다. 저자는 야곱의 "험악한 세월"이라는 고백이나 솔로몬의 "헛되고 헛되다"는 탄식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노년에 찾아오는 회한, 관계의 단절, 육체의 쇠락,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마주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인식은 허무주의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모세, 아브라함, 갈렙, 시므온과 같은 성경 인물들의 노년을 렌즈 삼아, 그 쇠락의 자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자리가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특히 3부 '부르심'과 4부 '지혜'에서 제시하는 관점은 은퇴 이후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시니어들에게 강력한 도전이 된다. 세상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기준으로 노년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은퇴가 없다"고 선언한다. 저자는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Doing)'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Being)'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함을 강조한다. 아브라함이 존재 자체로 복이 되었듯, 시니어들은 그 존재만으로 가정과 교회, 사회에 영적 어른으로서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력서를 위한 삶이 아닌 추도문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데이비드 브룩스의 인용과 맞물려 깊은 울림을 준다.
또한, 책 전반에 흐르는 '미완의 미학'은 완벽주의와 성취 지향적인 현대인들에게 큰 위로를 건넨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생을 마감했을 때,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의 아름다운 마침이었다. 우리의 인생이 계획대로 완성되지 않아도, 남은 과업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주어진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라는 메시지는 노년의 조급함을 내려놓게 만든다.
저자의 목회적 경험과 깊은 신학적 사색이 어우러진 이 책은 단순히 위로하는 에세이를 넘어선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깨어진 관계를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Living Will) 할지에 대한 실천적 지침을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나이듦의 영성』은 나이 들어가는 것이 두려운 이들에게는 용기를, 지나온 삶이 후회스러운 이들에게는 화해의 손길을, 그리고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선명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겉사람의 후패함을 넘어 속사람의 강건함을 소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책은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지혜의 벗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