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정치』: 정의와 평화를 향한 기독교 윤리적 탐구
1. 기독교 윤리의 사회적 책임과 방향성
이 책은 20세기 후반 기독교 윤리학계의 거장들의 사상을 통해 '사회 변혁'과 '전쟁과 평화'라는 두 가지 거대한 주제를 탐구한다. 저자 신원하는 한국 교회가 개인 구원을 넘어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 신학적 토대와 윤리적 전략을 가져야 하는지 모색한다. 특히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의 평화주의와 리처드 마우(Richard J. Mouw)의 변혁적 문화관을 대조적으로 분석하며,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이라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정당전쟁론과 시민종교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2. 십자가의 정치학: 존 하워드 요더의 평화주의 정치윤리
2.1. 예수의 정치성과 기독교 윤리
존 하워드 요더는 기독교 윤리학이 세속 문화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삶과 가르침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를 단순히 개인의 영혼 구원이나 종교적 영역에 국한된 인물이 아니라, 당시 사회를 변혁하려 했던 '정치적 인물'로 재해석한다
2.2. 대안적 정치 공동체로서의 교회
요더에게 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는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대안적 정치 공동체'다
2.3. 십자가의 윤리와 사회변혁 전략
요더가 제시하는 사회변혁의 핵심은 '십자가의 윤리'다.
혁명적 복종 (Revolutionary Subordination): 그리스도인은 권력자에게 굴복해서가 아니라, 예수처럼 자발적으로 복종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악의 권세를 무력화시킨다
. 세상 경영의 거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효율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리스도인은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 무력함의 수용: 예수가 힘없는 자의 모습을 취해 승리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정치적 수단으로 칼(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 이것이 요더가 말하는 '기독교 평화주의'다.
3. 거룩한 세속성의 윤리학: 리처드 마우의 변혁적 정치윤리
3.1. 문화적 칼빈주의와 창조론적 정치학
리처드 마우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적 칼빈주의' 전통에 서서, 하나님의 주권이 교회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 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3.2. 거룩한 세속성과 그리스도인의 책임
마우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제도와 문화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거룩한 세속성(Holy Worldliness)'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직 참여와 사회 경영: 정부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통로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입법, 행정 등 공직에 적극 참여하여 사회 구조를 변혁해야 한다
. 작은 악(Lesser Evil)으로서의 무력: 요더와 달리 마우는 죄 없는 이웃을 보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공권력(칼)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두 가지 악 중 '더 작은 악'을 선택하는 행위이며, 이웃 사랑의 실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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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말론과 사회윤리: 몰트만 vs. 마우
4.1. 위르겐 몰트만: 미래로부터 오는 변혁
몰트만에게 종말은 현재의 모순된 세상을 심판하고 새롭게 하는 '새 창조(Nova Creatio)'다. 현재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와 질적 차이가 있으며 모순된 상태다
4.2. 리처드 마우: 창조와 종말의 연속성
반면 마우는 종말을 창조의 파괴가 아니라 '창조의 회복과 완성'으로 본다.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일구는 문화와 제도의 선한 열매들은 정화되어 종말의 하나님 나라로 이어질 것이다(연속성)
5. 현대 미국 복음주의 정치윤리의 4가지 패러다임
미국 복음주의 교회는 1970년대 이후 침묵을 깨고 정치 참여를 시작했다. 그 유형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보수적 복음주의 (Carl Henry 등): 개인의 도덕적 변화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 하며, 구조적 악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 진보적 복음주의 (Richard Mouw, Jim Wallis 등): 구조적 악을 인식하고 정부의 기능을 활용해 정의와 복지를 실현하려 한다. 기존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추구한다
. 급진적 좌파 복음주의 (John H. Yoder 등): 기존 정치 체제는 악한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며, 교회 공동체를 통한 대안적 삶과 비폭력을 강조한다. 국가주의를 배격한다
. 신우파 근본주의 (Jerry Falwell 등):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재건하려는 목표를 가지며, 낙태 반대, 강력한 국방력 등을 지지하는 애국주의적 성향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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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당전쟁론과 평화주의의 대화
6.1. 두 전통의 역사와 주장
평화주의: 초대 교회의 전통과 메노나이트 등을 통해 이어져 왔다. 십자가의 도를 따라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거부한다
. 정당전쟁론: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기독교 주류 전통이다. 정의 수호와 이웃 사랑을 위해 엄격한 조건(정당한 원인, 최후의 수단 등) 하에 전쟁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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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핵 시대의 융합: 핵 평화주의 (Nuclear Pacifism)
핵무기의 등장은 두 전통을 '핵 평화주의'로 수렴시켰다. 핵전쟁은 그 파괴력 때문에 '비례성의 원칙'과 '비전투원 보호'라는 정당전쟁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 따라서 핵무기 사용은 절대적으로 거부되어야 하며, 핵 억지력은 잠정적 수단일 뿐 궁극적으로는 폐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주류를 이룬다
6.3. 정의로운 평화 조성론 (Just Peacemaking)
글렌 스타슨(Glen Stassen) 등은 전쟁 발생 후의 도덕성을 따지는 것을 넘어,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를 만드는 구체적 실천(인권 존중, 무기 감축, 국제 협력 등)을 강조하는 '정의로운 평화 조성론'을 제안한다
7. 미국 시민종교와 9.11 테러
7.1. 시민종교의 개념
미국은 기독교 국가는 아니지만, 국가의 역사와 목적을 종교적 언어(선택된 백성, 약속의 땅)로 해석하는 '시민종교(Civil Religion)'를 가지고 있다. 이는 사회 통합의 기능을 하지만, 동시에 국가의 정책을 신성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악용될 위험이 있다
7.2. 9.11 이후의 시민종교
9.11 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는 "자유와 악의 전쟁"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고 대테러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시민종교를 적극 활용했다
8. 이라크 전쟁과 정당전쟁론적 비판
8.1. 전쟁 개시의 정당성 (Jus ad Bellum) 위반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정당전쟁론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
정당한 원인: 이라크의 선제공격이 없었으므로 자기 방어 전쟁이 아니다
. 최후의 수단: 무기 사찰 등 외교적 해결 가능성이 남아 있었음에도 전쟁을 강행했다
. 정당한 권위: UN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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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예방 전쟁과 인도적 개입의 허구성
미국은 '예방 전쟁(잠재적 위협 제거)'과 '인도적 개입(독재로부터 해방)'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예방 전쟁은 임박한 위협이 입증되지 않았기에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인도적 개입 역시 순수한 동기보다 패권 장악의 의도가 컸기에 도덕적 정당성을 얻기 힘들다
8.3. 군사주의에 대한 경계
이라크 전쟁은 힘으로 평화를 얻으려는 '군사주의(Militarism)'의 발로다. 이는 무기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현대의 이단 종교와 같다
[서평] 정의와 평화의 길목에서: 한국 교회를 위한 윤리적 나침반
신원하 교수의 『전쟁과 정치: 정의와 평화를 향한 기독교윤리』는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와 한국 사회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기독교인이 붙잡아야 할 윤리적 기준이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이 책은 단순히 서구 신학 이론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9.11 테러, 이라크 전쟁, 미국의 패권주의 등 21세기의 구체적인 현장(Sitz im Leben) 속에서 기독교 윤리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탐구한다.
두 거장의 대화: 이상과 현실의 변증법
이 책의 전반부는 재세례파 전통의 존 하워드 요더와 개혁주의 전통의 리처드 마우의 사상을 대조하며 시작한다. 저자는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지 않는다. 요더의 '십자가의 정치학'은 교회가 세상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야 함을 역설한다. 이는 성장 지상주의와 물량주의에 빠져 세상과 구별됨을 상실한 한국 교회에 뼈아픈 통찰을 제공한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 최고의 사회 윤리"라는 요더의 외침은 교회의 본질 회복을 촉구한다.
반면, 리처드 마우의 '거룩한 세속성'은 기독교인이 현실 정치와 문화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발견하고, 구조적 악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종종 타계적 신앙에 머무르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한국의 보수적 신앙인들에게 구체적인 사회 참여의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저자는 이 두 관점의 긴장을 통해, 교회가 '거룩한 분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책임 있는 참여'를 해야 한다는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한다.
정당전쟁론의 현대적 적용과 군사주의 비판
책의 후반부는 정당전쟁론을 통해 현대의 전쟁을 해부한다. 저자는 고전적 정당전쟁론이 전쟁을 옹호하는 도구가 아니라,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엄격한 도덕적 기준임을 분명히 한다. 특히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정당전쟁론의 잣대(정당한 원인, 최후의 수단, 비례성 등)로 낱낱이 분석하며 그 도덕적 부당성을 고발하는 대목은 이 책의 백미다. '예방 전쟁'이나 '인도적 개입'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강대국의 패권주의적 폭력을 신학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기독교 윤리가 권력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됨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저자는 '군사주의'를 현대의 우상숭배로 규정한다. 안보를 위해 무기에 의존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힘을 더 신뢰하는 반기독교적 행태라는 지적은, 분단 현실 속에서 안보 논리에 매몰되기 쉬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이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는 예수의 말씀을 현대적 상황에서 예언자적으로 선포하는 것과 같다.
한국 교회를 향한 제언
이 책은 미국 시민종교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한국 교회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친미적 태도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한다. 기독교 신앙을 특정 국가의 이익이나 애국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복음의 보편성을 훼손하는 혼합주의일 수 있다. 저자는 한국 교회가 국가주의를 넘어 세계 시민으로서의 보편적 정의와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결론적으로, 『전쟁과 정치』는 신학적 깊이와 현실적 적실성을 겸비한 수작이다. 평화주의의 이상과 현실 정치의 책임을 통합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어 갈등하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 '정의로운 평화'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이 책은 기독교인이 비폭력의 영성을 견지하면서도, 구체적인 평화 조성(Peacemaking)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훌륭한 지침서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