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식, 《우리말 어원 사전》: 우리말의 뿌리와 역사를 찾아서
1. 저작의 배경과 목적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한민족의 얼과 문화를 담는 그릇입니다. 저자 백문식은 36년 간의 국어 교육과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말의 어원(말밑)을 탐구하여 낱말의 본디 형태와 뜻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이 책은 문헌 고증, 사투리 분석, 문화적 배경, 그리고 몽골어·만주어 등 인접 언어와의 비교 언어학적 방법을 통해 우리말 2,500여 개의 기원을 추적합니다. 특히 15세기 중세 국어 자료뿐만 아니라 《계림유사》, 《삼국사기》 지리지 등 고대 국어 자료를 폭넓게 활용하여 우리말의 통시적 변화를 실증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2. 어원 탐구의 주요 원리
이 사전은 낱말의 기원을 밝히는 데 있어 몇 가지 언어학적 원리를 적용합니다.
형태소 분석: 복합어나 파생어의 경우, 이를 구성하는 실질 형태소와 형식 형태소를 분석하여 결합 이전의 원뜻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은 '앗(初; 처음, 시작)'과 접사 '암/엄'이 결합된 것으로 분석합니다.
음운 변화의 추적: 시간의 흐름에 따른 소리의 변화 규칙을 적용합니다. 예를 들어 'ㅎ' 탈락, 구개음화, 원순모음화 등의 현상을 통해 현대어와 중세어, 고대어의 연결 고리를 찾습니다.
비교 언어학적 접근: 우리말의 기원을 찾기 위해 알타어족에 속하는 만주어, 몽골어, 퉁구스어, 튀르크어 및 고대 일본어와의 대응 관계를 살핍니다. 예를 들어 '바다'는 몽골어, 만주어 등과 비교하여 넓고 평평한 곳을 의미하는 '벌(field)'과 어원적 관련성을 갖습니다.
3. 주요 어휘별 상세 어원 풀이
가. 자연과 지리 관련 어휘
하늘: '한(大; 크다, 하나)'과 '알(卵; 알맹이, 둥근 것)'의 결합 혹은 '한+울(우리; 울타리)'로 봅니다. 크고 둥근 울타리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해: 태양을 뜻하는 '해'는 '희다(白), 하얗다'의 어근 'ㅎ'에서 비롯된 광명(光明)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다: 평평하고 넓은 땅을 뜻하는 '받/밭'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대 퉁구스어 'pata', 일본어 'wata' 등과 비교되며, 물이 가득 찬 넓은 벌판이라는 의미에서 확장되었습니다.
강(가람): 고유어 '가람'은 '가르다(分)'에서 온 말로, 물줄기가 갈라져 흐른다는 뜻을 가집니다. 한자어 '강(江)'이 들어오면서 점차 쓰임이 줄었습니다.
산(메): 옛말 '뫼'는 몽골어, 만주어 등의 산을 뜻하는 어휘와 대응하며, 곰(熊)이나 신(神)을 뜻하는 말과도 어원적 연관성이 있어 신성한 곳을 의미했습니다.
눈(雪):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누비다, 눕다'와 관련되어, 지상을 덮으며 누비는 하얀 것이라는 의미를 갖거나, '나리다(내리다)'의 변형으로 보기도 합니다.
나. 인간과 신체 관련 어휘
사람: '살다(生)'의 어근 '살-'에 명사화 접사 '-암'이 붙어 만들어진 말입니다. 즉, '살아있는 존재'를 뜻합니다.
몸: 15세기에는 '몸'이 몽골어, 만주어의 '자신'을 뜻하는 어휘와 대응했습니다. '모이다(集)'와 관련지어 여러 기관이 모인 집합체로 보기도 합니다.
얼굴: 중세어 '얼골'은 '얼(정신, 넋)'과 '골(틀, 꼴)'의 합성어입니다. 즉, 얼이 담긴 그릇이나 형상을 의미했으나, 현대에는 안면(顔面)만을 지칭하는 말로 의미가 축소되었습니다.
손과 발: '손'은 솟아난 것, 잡는 것을 의미하며, '발'은 밟는 것, 이동하는 기관을 의미하는 어근에서 유래했습니다.
마음: 옛말 '마음' 또는 '맛'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심장(염통)이나 뭉친 것을 뜻하는 어원과 연결됩니다.
다. 가족과 호칭 관련 어휘
아버지/어머니: '아비/어미'에 존칭 접사나 호격 조사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엄/암'은 크다, 으뜸이다, 모체를 뜻하는 어근으로 넓게 쓰입니다.
아들/딸: '아들'은 작은 것, 아이를 뜻하는 어근에서, '딸'은 따로 떨어져 나간 자식이라는 의미의 분리 개념 어근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사나이/계집: '사나이'는 남자를 뜻하는 '사나'에 사람을 뜻하는 접사가 붙었고, '계집'은 '계시다(在)'의 옛말 '겨시다'에 '집'이 붙어 '집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의미가 반영된 말입니다.
라. 생활 및 도구 관련 어휘
밥: 12세기 《계림유사》에 '박(pak)'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알타이어계의 먹다, 음식 등의 어휘와 광범위하게 연결됩니다.
옷: '입다'의 어간과 관련이 있으며, 외부로부터 몸을 가리거나 덮는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집: 짓다(作)의 명사형으로, 사람이 지어 만든 거처를 의미합니다.
가게: 임시로 지은 집을 뜻하는 한자어 '가가(假家)'에서 유래하여 물건을 파는 집으로 의미가 변했습니다.
김치: 딤채(沈菜; 채소를 담그다)라는 한자어가 구개음화와 음운 변화를 거쳐 '짐치 > 김치'로 변했습니다.
마. 추상적 개념 및 감정 어휘
사랑: 원래 '생각하다(思)'라는 뜻의 '사랑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상대를 깊이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이 '사랑'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슬기: '슬다(알다, 깨닫다)'와 관련된 어근에 접사가 붙어 지혜로움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답다: '아름(나, 개인, 사적인 것)'과 '답다'가 결합하여 '나답다, 나에게 어울린다'는 뜻에서 출발하여, 점차 시각적, 미적 쾌감을 주는 상태인 'Beauty'의 의미로 확장되었습니다. 또는 '알음(知; 앎)'에서 유래하여 지적인 조화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4. 우리말의 조어법과 특성
이 사전은 우리말이 단일어에서 출발하여 접사나 어미의 결합, 또는 다른 단어와의 합성을 통해 어휘가 풍부하게 확장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의성어/의태어의 발달: '개구리(개골개골)', '매미(맴맴)', '뻐꾸기' 등 소리에서 유래한 명사가 많습니다.
색채어의 분화: '붉다'에서 '밝다'가 나오고, '검다'에서 '감다(눈을)', '거미', '그림자' 등이 파생되는 등 감각적 어휘의 파생 관계가 뚜렷합니다.
중복형 합성어: '역전앞(驛前-)', '초가집(草家-)'처럼 한자어와 고유어가 결합하면서 의미가 중복되는 현상도 우리말의 역사적 변천 과정의 일부로 다룹니다.
5. 어원 탐구의 의의
저자는 맺음말을 통해, 어원을 아는 것은 단순히 옛말을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쓰는 말의 정확한 의미와 뉘앙스를 파악하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사고방식과 문화적 유전자를 이해하는 길임을 강조합니다. 잊혀져 가는 고유어를 되살리고,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 속에서 우리말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이 사전이 중요한 길잡이가 됨을 역설합니다.
[서평] 말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문화 여행: 백문식의 《우리말 어원 사전》을 읽고
언어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며, 소멸한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 말속에는 수천 년을 이어온 민족의 삶과 얼, 그리고 역사가 화석처럼 박혀 있다. 백문식의 《우리말 어원 사전》은 바로 이 언어의 화석을 발굴하여 그 속에 숨겨진 생명력을 복원해 내는 역작이다. 3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우리말 연구와 교육에 헌신한 저자의 노고가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은, 단순한 사전적 정의를 넘어 우리말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게 해주는 나침반과 같다.
1. 실증적 연구와 비교 언어학의 조화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철저한 문헌 고증에 있다. 저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계림유사》 등 고대 자료부터 15세기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의 한글 문헌들까지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낱말의 역사를 추적한다. 단순히 "그럴 것이다"라는 민간 어원설을 배제하고, 언어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낱말의 변화 과정을 'A>B>C'와 같이 도식화하여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신뢰를 높였다. 특히 몽골어, 만주어, 퉁구스어 등 알타이 어족과의 비교를 통해 우리말의 계통적 기원을 밝히려는 시도는, 우리말이 한반도라는 지리적 경계를 넘어 북방 대륙과 문화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2. 어휘의 확장을 통한 사고의 확장 사전에 수록된 2,500여 개의 표제어는 우리가 흔히 쓰는 기초 어휘부터 지금은 잊혀가는 옛말과 사투리까지 아우른다. '사랑'이 원래 '생각하다'에서 유래했다는 점, '어른'이 '얼우다(교합하다, 결혼하다)'에서 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책임을 지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해석 등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독자에게 철학적 사색의 기회를 제공한다. 낱말 하나하나에 깃든 조상들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읽어내는 과정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말의 참뜻'을 되새기게 한다. 또한 '가시버시', '마수걸이', '에누리' 등 일상에서 쓰면서도 정확한 유래를 몰랐던 말들의 뿌리를 확인하는 과정은 지적 쾌감을 선사한다.
3. 우리말의 고유성과 문화적 자긍심 저자는 한자어에 밀려 사라진 고유어들을 재조명하는 데에도 힘을 쏟는다. 예를 들어 '강' 대신 '가람', '산' 대신 '메', '백(百)' 대신 '온'과 같은 말들의 어원을 밝히며 우리말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조어 능력을 강조한다. 이는 무분별한 외래어와 외국어 혼용이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말의 소중함과 주체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김치'가 '딤채'에서 변화한 과정이나, '가게'가 '가가(假家)'라는 임시 건물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등은 언어가 당시의 주거, 식생활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임을 증명한다.
4. 아쉬움과 제언 물론 모든 어원 연구가 그렇듯, 고대어의 재구(再構)나 특정 어휘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계의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알타이어계와의 대응 관계는 여전히 연구가 진행 중인 분야이므로, 일부 해석은 가설의 영역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가능한 한 가장 타당성 있는 설명과 학계의 성과를 반영하려 노력했다.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 다소 전문적인 음운 변화 설명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풍부한 예문과 속담을 곁들여 이를 보완하고 있다.
5. 총평 백문식의 《우리말 어원 사전》은 책장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만 찾아보는 참고도서가 아니다. 곁에 두고 틈틈이 읽으며 우리말의 맛과 멋,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음미해야 할 교양서이자 인문학 서적이다. 청소년들에게는 어휘력 향상과 국어 공부의 길잡이가 될 것이며, 성인들에게는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주는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말이 곧 정신이고 문화라면, 이 책은 한국인의 정신적 뿌리를 찾아가는 가장 성실하고 친절한 지도라 할 수 있다. 우리말을 사랑하고 그 근원을 알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