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광장신학』: 성경적 서사와 공공성의 통합
왜 '하나님 나라'와 '광장신학'인가?
이 책은 오늘날 신학계와 한국 교회가 주목해야 할 두 가지 핵심 주제, 즉 '하나님 나라'와 '공공신학(광장신학)'을 통합적으로 다룬다. 저자 유태화 교수는 조직신학자로서의 통찰을 바탕으로 성경신학적 서사와 조직신학적 구조를 엮어,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교회 내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 즉 '광장'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규명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1부는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원과 성격을, 제2부는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관계를 통해 공공신학의 토대를 마련한다.
제1부: 성경신학적인 서사의 전망에서
1장. 아우토 바실레이아 (Auto Basileia): 하나님 나라 그 자체이신 예수
하나님 나라 논의의 핵심은 '아우토 바실레이아(αὐτὸ βασιλεία)'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오리게네스가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예수 자신이 곧 하나님 나라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동일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눅 17:21)고 하셨을 때, 이는 바리새인들의 내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서 계신 예수 자신을 가리킨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떠나서는 설명될 수 없는 실재다.
구약과 신약의 통합: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예표했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이스라엘은 혈통적 민족을 넘어, 믿음으로 말미암는 언약 백성의 공동체로 확장된다. 예수는 구약이 기다려온 메시아로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의 세력을 꺾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셨다.
종말론적 성취: 슈바이처는 예수가 종말을 가져오는데 실패했다고 보았으나, 성경적 관점(C.H. Dodd 등)에서 볼 때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결정적인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을 이미 실현했다(Realized Eschatology).
2장.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먼 미래의 일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재 역사 속에 침투해 있다.
예수의 세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죄를 짊어지시려는 '모든 의를 이루는' 행위였다. 이는 공생애의 시작이자 하나님 나라 사역의 공식적인 출발점이다.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는 대속적 죽음(화목제물)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만족시킨 사건이며, 부활은 예수가 만유의 주(Lord)이심을 확증한 사건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탄의 통치는 심판받았고(D-Day), 하나님 나라는 결정적으로 도래했다.
교회의 탄생: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세례)한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이 세대(this age)에 속하지 않고 올 세대(age to come)의 생명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종말론적 대안 공동체다.
3장. 미래의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왔으나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았다. 이 장에서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양상을 다룬다.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교회: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로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천상의 교회(낙원)는 죽음 이후 부활을 기다리며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중간기 상태(Intermediate State)의 성도들을 의미한다.
재림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있는 자들이 변화되어 지상과 천상의 교회가 통합된다. 이는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포함한 전인적인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
최후의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 재림과 함께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며, 악인과 사탄은 영벌(지옥)에, 의인은 영생(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 천국은 막연한 하늘 공간이 아니라, 갱신된 피조 세계 전체를 의미하며,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함께 거하시는 상태다.
4장. 갈등하는 하나님 나라
'이미'와 '아직' 사이의 중간기(Interim Period)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영적 전투의 현장에 있다.
미혹의 영 vs 진리의 영: 사탄은 이미 패배했으나, 남은 때가 얼마 없음을 알고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다(미혹의 영). 반면, 성령(진리의 영)은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구원을 보증한다.
영적 전투의 실재: 이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에 대한 것이다. 사탄은 문화, 가치관, 시대정신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성도의 무장: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검(말씀)을 가져야 한다. 이는 세상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적극적인 저항이다.
5장.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존재 방식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에만 갇혀 있지 않다. 하나님의 통치는 전 우주적이다.
창조와 구속: 하나님은 구속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창조의 주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특별은총의 영역)뿐만 아니라 세상(일반은총의 영역)에도 미친다.
제사장 나라로서의 교회: 교회는 세상을 위한 제사장 나라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지만(거룩),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고 축복하는 사명을 가진다.
공공의 선(Public Good):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비기독교인들과 공존하며 '공공의 선'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타협이 아니라, 일반은총 영역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질서를 세워가는 일이다.
제2부: 조직신학적인 통합의 전망에서
6장.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이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
공공신학의 이론적 토대를 놓기 위해 주요 신학자들의 계시론을 분석한다.
카를 바르트 (Karl Barth): 자연신학을 철저히 배격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만을 인정했다(기독론적 일원론). 이는 나치즘과 같은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저항이었으나, 창조 세계와 일반 역사를 설명하는 데 한계를 지닌다.
에밀 브루너 (Emil Brunner): 바르트와 달리 일반계시의 존재를 인정하고 '접촉점'을 이야기했다. 인간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보았다.
코넬리우스 반틸 (Cornelius Van Til): 전제주의 변증학을 통해 불신자의 자율적 이성을 비판했다. 기독교 유신론을 전제하지 않고는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이는 일반계시의 효용성을 다소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 (저자가 지지하는 입장) '일반은총(Common Grace)' 교리를 통해 창조 세계 전체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다. 그는 특별은총(구원)과 일반은총(사회, 문화, 예술, 과학 등)이 상호 보완적이며,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7장. 광장에 선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공공적 현존
교회가 어떻게 세상(광장) 속에 존재해야 하는가?
대조 공동체이자 대안 공동체: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과 구별되는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여야 한다. 동시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정의를 보여주는 대안 사회(Alternative Society)가 되어야 한다.
적극적인 공존: 스킬더(Schilder)나 요더(Yoder)처럼 세상을 전적 타락한 곳으로만 보거나 분리주의를 택해서는 안 된다. 카이퍼의 모델처럼, 교회는 각 영역(정치, 경제, 교육 등)이 고유한 주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돕는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공공성 회복: 교회는 게토화(Ghettoization)를 거부하고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이는 교회의 힘을 과시하는 '고지론'이 아니라, 섬김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공의, 사랑)을 사회 구조 속에 녹여내는 방식이어야 한다.
8장. 계몽주의적인 유토피아니즘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
세속적 인본주의와 기독교적 종말론의 차이를 명확히 한다.
계몽주의의 한계: 인간 이성의 진보를 통해 지상 낙원(유토피아)을 건설하려던 계몽주의적 기획은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통해 실패로 드러났다.
기독교적 소망: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재림)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 도피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부조리와 싸우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심어야 한다.
기독교 대학의 역할: 기독교 대학은 학문의 영역에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합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무장된 인재를 양성하여 각 사회 영역으로 파송하는 중요한 공공신학의 요람이다.
9장. 종교적 광장에 선 하나님 나라
다원화된 현대 사회,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기독교는 타종교와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가?
한국의 종교성: 한국인은 유일신 사상(하느님)과 샤머니즘(기복 신앙)의 이중적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불교와 유교도 이 토양 위에서 토착화되었다. 기독교 역시 기복주의와 개교회주의로 왜곡될 위험이 있다.
종교다원주의 비판: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나, 익명의 그리스도인(라너) 같은 포괄주의는 기독교의 고유한 정체성(복음의 유일성)을 훼손한다.
배타성을 넘어서는 공존: 기독교는 구원의 유일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타종교인과 '공공의 선'을 위해 협력할 수 있다.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인권, 환경, 평화 등의 이슈를 놓고 대화하고 연대해야 한다. 이것이 정복적 선교가 아닌, 섬김을 통한 선교이며 진정한 광장신학의 실천이다.
[서평] 광장에서 외치는 십자가: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신학적 나침반
1. 게토화된 교회를 향한 도전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성장이 정체되고, 사회적으로는 신뢰도가 추락하고 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너희들만의 리그"라고 비판하며,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잊은 채 자신들의 성 안에 갇혀 고립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유태화 교수의 『하나님 나라와 광장신학』은 매우 시의적절하고도 묵직한 신학적 대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성경신학의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조직신학의 체계적인 틀에 담아, 교회가 왜, 그리고 어떻게 '광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2. '아우토 바실레이아'와 하나님 나라의 통전성 이 책의 가장 큰 신학적 성취는 '하나님 나라'를 장소나 통치 개념으로만 설명하는 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아우토 바실레이아)으로 정의한 데 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 논의가 자칫 빠질 수 있는 추상성을 극복하고, 기독론적 중심성을 확고히 한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 나라이시기에, 그분과 연합한 교회는 필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 방식이 된다. 저자는 1부에서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계시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특히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 속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영적 전투와 거룩한 삶의 의무를 강조한 부분은, 종말론을 현실 도피가 아닌 현실 변혁의 동력으로 삼아야 함을 잘 보여준다.
3. 아브라함 카이퍼의 재해석과 공공신학의 토대 2부에서 저자는 바르트, 브루너, 반틸, 카이퍼 등 거장들의 신학을 비교 분석하며 공공신학의 길을 모색한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은 한국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이원론적 세계관에 갇혀 교회 일은 '성(聖)'하고 세상 일은 '속(俗)'되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저자는 카이퍼를 통해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 영역임을 역설한다. 일반계시와 일반은총을 긍정하는 것은 세속화에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문화, 학문, 정치, 사회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진리가 발견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인이 그 영역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해야 한다는 '문화 명령'의 수행이다. 이는 교회가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대조 사회'이자 '대안 사회'로서 공존하며 공공의 선을 추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4.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기독교적 정체성과 관용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다원화된 현대 사회, 특히 한국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다. 저자는 한국인의 기저에 깔린 유일신 사상과 샤머니즘을 분석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토착화 과정에서 왜곡되었는지를 지적한다. 나아가 종교다원주의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가 취해야 할 태도를 명확히 한다. 저자는 구원의 유일성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타종교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협력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이는 배타적 정복주의도 아니고, 진리를 포기한 다원주의도 아니다.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광장에 나가, 보편적 가치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웃과 연대하는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5. 신학적 깊이와 실천적 적용의 조화 『하나님 나라와 광장신학』은 쉬운 책은 아니다. 성경신학적 주해와 조직신학적 논쟁이 촘촘하게 얽혀 있어 독자들에게 지적 긴장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책은 상아탑의 신학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의 시선은 항상 교회의 강단과 세상의 광장을 향해 있다. 이 책은 목회자들에게는 설교의 지평을 개인의 구원에서 우주적 통치로 넓혀줄 것이며, 평신도들에게는 직장과 사회생활이 단순한 생계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거룩한 소명임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성경적 원리와 신학적 뼈대, 그리고 실천적 지혜를 제공하는 훌륭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세상의 헛된 희망에 맞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참된 소망을 노래하는 '광장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통해 더 많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