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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김승철) 리뷰/요약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 - 침묵에서 깊은 강까지

1. 흔적과 아픔

이 책은 신학자이자 엔도 슈사쿠 연구가인 김승철 교수가 일본의 대표적인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문학 세계를 신학적, 문학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조망한 평론서입니다. 저자는 엔도 문학의 핵심을 '흔적'과 '아픔'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정의합니다.

엔도는 인간의 삶에 남겨진 신의 흔적을 추적하는 작가입니다. 그 흔적은 영광스러운 기적의 형태가 아니라, 배신과 나약함,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아픔'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책은 엔도의 초기작부터 만년의 걸작 《깊은 강》에 이르기까지, 서구 기독교를 일본(동양)적 풍토에 어떻게 토착화하려 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종교'가 어떻게 '어머니의 종교'로 변용되었는지를 추적합니다.


2. 엔도 문학의 5가지 핵심 테마

I. 《침묵》의 재발견: 끝나지 않은 신앙의 고백

많은 독자가 엔도의 대표작 《침묵》을 읽을 때,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성화)를 밟고 닭이 우는 장면에서 소설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침묵》의 진정한 주제는 부록처럼 여겨지는 <기리시탄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 신은 침묵하지 않았다: 엔도는 '신의 침묵'이 아니라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쓰고 싶어 했습니다. 배교 후 로드리고(오카다 산에몬)와 기치지로가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비밀스럽게 신앙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비록 배교의 형식을 취했더라도 신앙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 흔적의 문학: 후미에에 남겨진 검은 발자국은 배신자들의 아픔이자, 그 아픔을 통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엔도는 "밟아도 좋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하는 신이 아닌 고통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의 예수를 그려냅니다.

II. 원체험: 어머니와 '몸에 맞지 않는 양복'

엔도 문학의 출발점은 그의 개인적인 생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죄의식: 엔도의 부모님은 이혼했고, 엔도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의 열성적인 권유로 받은 세례는 그에게 '비자발적 세례'였으며, 이는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짐이자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몸에 맞지 않는 양복: 엔도는 서구적인 기독교를 어머니가 입혀준 '몸에 맞지 않는 양복'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이 양복을 벗어버리는 대신(신앙을 버리는 대신), 자신의 몸(일본인의 감성)에 맞게 수선하는 작업, 즉 기독교의 토착화를 평생의 문학적 과제로 삼았습니다.

  • 거리감의 인식: 프랑스 유학 시절, 엔도는 서구의 일신론적 기독교와 일본의 범신론적 풍토 사이의 결정적인 '거리감'을 체험합니다. 이는 초기작 《백색인》, 《황색인》에서 죄의식의 부재와 피로감으로 형상화됩니다.

III. 기독교 신앙의 일본적 변용: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서구의 기독교가 '부성적(父性的)'이라면, 엔도가 일본인의 감성에 맞춰 재해석한 기독교는 '모성적(母性的)'입니다.

  • 심판하는 신 vs 용서하는 신: 서구의 신이 죄를 심판하고 벌하는 엄격한 아버지의 이미지라면, 엔도가 발견한 신은 자식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끝없이 용서하는 어머니의 이미지입니다. 이는 일본의 '마리아 관음' 신앙이나 정토교적 구원관과 맥을 같이 합니다.

  • 동반자 예수: 엔도는 기적을 행하는 전능한 예수가 아니라,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인간의 슬픔을 등에 지고 함께 걷는 '동반자'로서의 예수를 강조합니다. 이는 《위대한 바보》의 가스통이나 《내가 버린 여자》의 미쓰와 같은 '바보' 성자들의 모습으로 구체화됩니다.

  • 무력함의 역설: 현실에서 무력해 보이는 사랑만이, 상처 입은 인간을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역설을 제시합니다.

IV. 역사소설과 이중생활자: 배교자와 순교자 사이

엔도는 역사소설을 통해 자신을 투영했습니다. 특히 '강한 자'(순교자)보다는 '약한 자'(배교자)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습니다.

  • 약자의 복권: 《침묵》의 로드리고, 기치지로뿐만 아니라 《철의 칼》의 고니시 유키나가처럼,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이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에게서 엔도는 자신의 분신을 봅니다.

  • 《사무라이》와 하세쿠라 쓰네나가: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결국 그 신앙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는 하세쿠라의 모습은 "형식적인 세례가 어떻게 내면의 진실로 변해가는가"를 보여주는 엔도 자신의 신앙 고백과도 같습니다. 엔도는 "하세쿠라는 바로 나다"라고 고백합니다.

V. 《깊은 강》: 종교 다원주의와 대통합

엔도 문학의 집대성인 《깊은 강》은 서구와 동양, 기독교와 불교/힌두교의 경계를 허무는 거대한 통합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 양파(Onion): 주인공 오쓰는 신을 '양파'라고 부릅니다. 이는 신이 특정한 이름이나 교리에 갇히지 않는 사랑의 작용 그 자체임을 의미합니다.

  • 갠지스강의 상징성: 갠지스강은 산 자와 죽은 자, 성녀와 창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강입니다. 엔도는 이곳에서 모든 종교와 인간의 고통을 포용하는 거대한 생명의 흐름, 즉 '존재의 성화'를 발견합니다.

  • 밟힘과 밝힘: 엔도의 문학은 타인을 밟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슬픈 운명(죄)을 자각하고, 그 밟힌 자(예수, 미쓰, 가스통)가 오히려 밟은 자를 구원한다는 역설적 진리를 '깊은 강'의 흐름 속에 녹여냅니다.




[서평] 신의 침묵 너머, 사랑의 목소리를 듣다

일본적 기독교 문학의 정점, 엔도 슈사쿠를 다시 읽다

김승철 교수의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은 단순히 한 작가의 작품 해설서가 아닙니다. 이 책은 '서양의 옷'인 기독교를 입고 평생을 불편해하면서도, 끝내 그 옷을 수선하여 자신의 살가죽처럼 만들어낸 한 영혼의 치열한 투쟁기입니다.

1. '약함'을 통한 구원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울림은 '약함'에 대한 긍정입니다. 보통의 종교 문학이 순교자나 영웅적인 신앙을 찬미할 때, 엔도는 배교자, 겁쟁이, 그리고 평범한 소시민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저자는 엔도가 《침묵》의 후미에 사건을 통해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덜 괴로워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대목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인간의 나약함은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신의 자비가 임하는 통로가 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고통받는 수많은 독자에게 깊은 위로를 건넸습니다. 저자는 이를 '동반자 예수'라는 개념으로 신학적으로 명쾌하게 정리해 줍니다.

2. 《침묵》의 오독을 바로잡다

이 책의 가장 큰 학문적 공헌은 《침묵》의 결말 부분인 <기리시탄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에 대한 재조명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어 번역본에서 누락되거나 독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이 부분을, 저자는 엔도 문학의 핵심 열쇠로 제시합니다. 로드리고가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관리들의 눈을 피해 평생토록 비밀스럽게 신앙을 지키며 '사랑의 행위'를 실천했다는 해석은 《침묵》을 '패배의 기록'에서 '승화된 신앙의 기록'으로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이는 엔도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신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받는 자들 속에 숨어 계신 '신의 현존'이었음을 명확히 합니다.

3. 어머니의 종교, 아시아의 신학

저자는 엔도가 평생 추구한 '어머니 되시는 신'의 이미지가 단순히 개인적인 모성 결핍의 보상이 아니라, 서구의 부성적(심판적) 신관을 극복하려는 아시아적 신학의 시도였음을 밝혀냅니다. 인도의 갠지스강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추한 여신 '차문다'에게서 고통받는 성모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엔도의 시선은 종교 간의 벽을 넘어서는 보편적 영성으로 확장됩니다. 이는 기독교가 서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아시아의 고통과 정서 속에서도 충분히 꽃피울 수 있음을 문학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4. 우리 안의 '흔적'을 찾아서

이 책은 독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인생에는 어떤 흔적이 남아 있습니까?" 엔도 슈사쿠는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밟고 지나갈 때 남는 그 아픈 흔적 속에 신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김승철 교수의 안내를 따라 엔도의 작품을 읽는 것은, 내 안의 약함을 마주하고, 내 삶에 새겨진 신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거룩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엔도 슈사쿠의 팬뿐만 아니라, 신앙과 삶의 모순 속에서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독서로 추천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