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1. 지금 여기로 걸어 나온 십계명
이 책은 2012년 가을, 신앙인아카데미, 우리신학연구소,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연합하여 기획한 강좌를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기획하면서 십계명의 분류 방식에 대한 차이를 조정했는데, 이 책에서는 가톨릭의 분류 방식을 따르되 개신교의 문제의식을 결합하는 방식을 취했다.
2. 계명별 요약
제1계명: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이찬수)
주제: '신이 하나'라는 말에 대한 범재신론적 해석
제1계명은 흔히 타종교를 배척하거나 교리적 독선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오용되어 왔다. 그러나 저자는 고대 유대인들의 '유일신' 개념이 숫자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전적인 헌신'의 대상으로서의 유일함을 의미했다고 지적한다.
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이상철)
주제: 신의 이름을 둘러싼 전통, 상상, 그리고 진실
이 계명은 단순히 신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저자는 데리다(Derrida)의 해체론을 빌려와 신의 이름이 갖는 '불가능성'과 '틈'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세가 신의 이름을 물었을 때 신은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 혹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모호한 답변을 내놓는다. 이는 인간이 신을 규정하거나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제3계명: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 (유승태)
주제: 체제의 분할 전략을 넘어서: 안식일 정신과 기본소득운동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생존 수단으로 전락했고, 기술 발전과 구조조정은 '고용 없는 사회'와 '프리카리아트(불안정한 무산계급)'를 양산하고 있다.
제4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김희선)
주제: 부모 공경의 계명과 아동 학대
이 장은 끔찍한 아동 학대 사건들(울산 계모 사건, 부천 초등생 시신 훼손 등)을 배경으로 한다. 한국 사회와 교회는 오랫동안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자녀의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도구로 사용해 왔다.
제5계명: 살인하지 말라 (김진호)
주제: 서바이벌의 체계를 척결하라: 사회적 타살로서의 자살에 관하여
한국 사회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자살을 개인의 나약함이 아닌, 사회적 타살로 규정한다.
제6계명: 간음하지 말라 (김나미)
주제: 이성애 가부장제 없이는 불가능한 간음 제도
이 계명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정조를 통제하고 가부장적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저자는 성서 시대의 간음이 '남의 아내(소유물)'를 침해하여 남성 간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음을 지적한다.
제7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정용택)
주제: 악마는 뒤처진 자부터 잡는다
송파 세 모녀 사건과 같은 비극은 우리 사회의 빈곤과 부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성서의 '도둑질(가나브)'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절도뿐만 아니라 '사람을 유인하여 노예로 삼는 행위'를 포함한다고 분석한다.
제8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홍정호)
주제: 살리는 말의 주인이 되라: 말이 말 같지 않은 시대의 말에 관하여
이 계명의 본래 맥락은 법정에서의 위증을 금지하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재판은 약자가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으나, 권력자들은 거짓 증언을 통해 약자의 권리를 빼앗았다(나봇의 포도원 사건 등).
제9계명: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백소영)
주제: 가부장제로부터 성과 사랑을 해방하라
제9계명과 제10계명은 가톨릭 분류법에 따라 아내와 재물을 구분한다. 저자는 제9계명이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간주했던 고대 가부장제 문화의 산물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탐심 금지'의 보편적 정신을 찾는다.
제10계명: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 (이숙진)
주제: 탐욕의 다수결인 시대, 우리 안의 탐욕
마지막 계명은 행위가 아닌 마음의 문제, 즉 '탐심'을 다룬다. 저자는 현대 사회가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덕담이 될 정도로 탐욕을 긍정하고 부추기는 시스템임을 비판한다.
3. 역사로서의 십계명 (김진호)
십계명은 시나이산에서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재해석된 산물이다. 특히 기원전 7세기 요시야 왕의 개혁 운동 당시, 왕과 귀족의 독점을 견제하고 백성(암하아레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 대헌장'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서평] 십계명, 박제된 돌판에서 현대의 광장으로 걸어 나오다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은 제목 그대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그 진정한 의미가 망각된 십계명을 현대 사회의 심장부로 소환해내는 책이다. 영화 속의 홍해 기적이나 교회 학교의 암기 사항으로 전락한 십계명은, 이 책을 통해 21세기 한국 사회의 가장 아픈 환부들을 어루만지고 수술하는 날카로운 메스로 다시 태어난다.
1. 텍스트를 넘어 컨텍스트로: 고대 법의 현대적 번역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십계명을 '하늘에서 떨어진 절대 불변의 문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저항의 언어'로 읽어낸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이 제국(이집트)의 착취 시스템에 저항하여 만든 '해방 공동체'였음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역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저자들은 십계명의 각 조항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근본주의적 태도를 배격하고, 그 이면에 담긴 '약자 보호'와 '정의 실현'이라는 정신을 현대적으로 번역해낸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나 송파 세 모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적 타살'에 대한 고발로 확장된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한 절도가 아니라, 금융 자본과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인간의 삶을 수탈하는 구조적 악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이러한 해석은 십계명이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 삶의 현장에서 작동해야 할 살아있는 윤리임을 웅변한다.
2.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 교회와 사회를 향한 죽비
이 책은 독자들을, 특히 기독교인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저자들은 우리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두었던 치부들을 과감하게 들추어낸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어떻게 가정 폭력을 은폐하고 아동 학대를 정당화하는 데 오용되었는지(김희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어떻게 가부장적 소유욕을 강화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억압했는지(김나미, 백소영)를 폭로할 때, 독자는 기존의 통념이 무너지는 충격과 함께 새로운 윤리적 성찰의 기회를 얻게 된다. 또한, 유일신 사상을 배타적 독선이 아닌 '범재신론적 포용'으로 해석하거나(이찬수), 안식일을 '기본소득'이라는 급진적 사회 정책과 연결하는(유승태) 시도는 종교가 개인의 내면적 위로에 머물지 않고 사회 구조적 변혁을 꿈꾸는 급진적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식의 단순 도식에 갇힌 한국 기독교에 던지는 묵직한 도전장이다.
3. 인문학적 깊이와 사회적 실천의 만남
신학자뿐만 아니라 인문학자, 사회학자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저자들의 협업은 십계명 해석에 풍성함을 더한다. 데리다의 해체론, 아감벤의 정치철학, 기든스의 사회학, 페미니즘 이론 등 현대 인문학의 성과들이 성서 해석과 만나면서 십계명은 종교 경전을 넘어 보편적인 인류의 지혜이자 사회 윤리 텍스트로 격상된다. 특히 이 책은 각 계명의 해석 끝에 구체적인 실천적 과제를 제시한다. 기후 위기 시대에 육식을 줄이는 것, 소비주의 문화에 저항하는 것, 법정에서 약자의 편에 서는 것,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 등은 십계명을 준수하는 것이 곧 '시민적 덕성'을 함양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4. 다시 쓰는 돌판, 다시 세우는 정의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이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우리는 십계명을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우리에게 십계명이라는 오래된 거울을 닦아내어, 그 속에 비친 우리의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민낯을 직시하게 한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서 십계명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 책은 종교인에게는 맹목적인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될 것이며, 비종교인에게는 고대 텍스트가 어떻게 현대 사회의 모순을 꿰뚫는 날카로운 비판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인문학적 탐구가 될 것이다. 십계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단, 우리가 그것을 끊임없이 '숙고'하고 '재해석'하여 우리 시대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갈 때만 그렇다. 이 책은 바로 그 작업을 위한 가장 탁월한 안내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