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종류의 구원론》 요약
개신교의 '즉시 구원' vs 동방교회의 '점진적 구원'
김형선 목사의 《두 종류의 구원론》은 "믿기만 하면 즉시 구원받는다"는 개신교 구원론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 책 소개: 당신의 '구원의 확신'은 성경적인가?
오늘날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즉시 구원받는다"는 '단번의 구원'을 믿고 있습니다
저자는 개신교의 '즉시 구원론'이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키는 문제를 낳았으며
☦️ 두 종류의 구원론 비교
이 책은 개신교 구원론의 대안으로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한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의 구원론을 제시합니다.
개신교 (Protestantism): 즉시 구원 (단번의 구원)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며, 이는 즉각적으로 완료됩니다
. 로마서 10장 9-10절("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저자는 이것이 성경을 단편적으로 해석한 오류라고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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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교회 (Eastern Church): 점진적 구원 (과정으로서의 구원)
구원은 '즉시' 완료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 가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입니다
.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처럼, 구원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 정교회 신자들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구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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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에 이르는 3단계: 정화, 조명, 합일
저자는 초대교회 교부들(Church Fathers)이 가르친 구원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3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합니다
제1단계: 정화 (Purification)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절대적인 첫 단계로, 자신을 성결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 이는 단순한 회개를 넘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거룩함의 추구입니다 .
제2단계: 조명 (Illumination)
정화된 영혼이 말씀의 빛, 즉 복음의 비밀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 이는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아는 문자적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영적인 복음을 의미합니다 .
제3단계: 합일 (Union/Theosis)
구원의 완성 단계로, 영혼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 이는 인간이 신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신화, 神化)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
결론적으로 이 책은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안일한 신앙에서 벗어나, 자신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는 '십자가 복음'과 '생명 소유의 길'을 따를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 서평: 구원의 확신을 뒤흔드는 날카로운 질문
김형선 목사의 《두 종류의 구원론》은 개신교 신자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구원의 확신'에 정면으로 돌을 던지는 책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상식처럼 여겼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구원론이 사실은 초대교회 이단의 사상이었다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시작합니다
장점: 역사적 신학으로의 초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개신교 신학의 울타리 안에서만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의 뿌리인 서방교회(로마 가톨릭)와 그보다 더 오래된 동방교회(정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끌어온다는 점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믿음과 행함의 분리'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동방교부들의 '정화-조명-합일'이라는 구원의 3단계는,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구체적이고 점진적인 영적 지도를 제공합니다. 이는 신앙을 "사건"이 아닌 "여정"으로 보게 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을 끊임없이 성찰하게 만듭니다
한계점: 강한 어조와 이분법적 접근
다만, 저자의 주장은 매우 단호하고 타협이 없습니다. 개신교의 구원론을 "엉터리", "거짓"
또한 마틴 루터가 '오직 믿음'이 아닌 동방교부들의 사상을 따랐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신학적으로 복잡한 논쟁거리임에도 다소 단순화하여 제시된 감이 있습니다. "일만 스승(육의 말씀 전문가)은 죽은 자이고, 아버지는(영의 말씀 전문가) 산 자다"
결론: '값싼 은혜'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책
이 책은 편안한 신앙생활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불편한 책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과 신앙의 불일치로 고민하는 사람, "주여, 주여" 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한계를 느낀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