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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한병철) 리뷰/요약

 

📖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한병철 저)

철학자 한병철은 이 책에서 현대 신자유주의 사회의 작동 방식을 분석하며, 왜 극심한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혁명이 불가능해졌는지 설명합니다. 그는 그 원인을 억압이 아닌 '자유'와 '긍정성'에서 찾으며, 이로 인해 '피로사회'와 '자기 착취'가 만연하게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1.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과거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규율 및 산업 사회는 공장 소유주라는 명확한 '억압자'가 존재했습니다. 이 '타자 착취'는 명백한 억압이었기에 저항과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병철에 따르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는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입니다. 이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에서 개인은 다음과 같은 상태에 놓입니다.

  • 자기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 개인은 더 이상 억압당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경영하고 성과를 내야 하는 '경영자'가 됩니다.

  • 자기 착취: 모든 사람은 '주인인 동시에 노예'입니다. 타인에 의한 착취는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성 속에서 '자발적인 자기 착취'로 대체됩니다.

  • 내면화된 실패: 이 시스템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를 문제 삼는 대신, 자기 자신을 탓하고 부끄러워합니다. 계급투쟁은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바뀝니다.

이처럼 '느껴지는 자유' 가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저항해야 할 대상, 즉 억압하는 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시스템을 바꾸려 하는 대신 우울증에 걸리거나 소진(burnout)되며, 바깥을 향한 공격성(혁명)은 자신을 향한 공격(자살)으로 바뀝니다.

2.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 '설죽은 삶'의 도래

한병철은 자본주의의 멈출 수 없는 성장 및 생산 강박이 '죽음 충동'과 닮아있다고 분석합니다. 하지만 이 동력의 핵심은 프로이트의 개념과 달리 '죽음에 대한 부정' 에 있습니다.

  • 자본은 절대적 손실인 '죽음'에 맞서 축적됩니다. '더 많은 자본은 더 적은 죽음을 뜻한다'는 원시적 믿음이 작동합니다.

  • 하지만 죽음을 삶에서 철저히 분리하고 부정하려는 이 노력은 역설적으로 '설죽은 삶' (산 죽음)을 낳습니다.

  • 삶은 생동감을 잃고 '생존'과 '기능'으로 축소됩니다. 우리는 건강 히스테리에 빠진 '성과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가 됩니다.

  • 자본주의는 생명력을 가진 것을 기계적인 것, 죽은 것(데이터, 사물)으로 변환하는 '네크로필리아'(시체애호증) 적 특징을 띱니다.

3. 디지털 파놉티콘과 투명사회: '같음의 지옥'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는 '디지털 파놉티콘'과 '투명사회'를 통해 더욱 효율적으로 작동합니다.

  • 자발적 감시: 오늘날의 디지털 파놉티콘은 벤담이나 조지 오웰의 감시국가와 다릅니다. 우리는 외적 강제 없이 '자유의지로 발가벗으며' 스스로를 전시하고 노출합니다('자기 조명').

  • 긍정성의 폭력: '투명성'은 민주주의가 아닌 경제적 명령입니다. 투명사회는 모든 부정성(秘密, 낯섦, 다름)을 제거합니다.

  • 같음의 지옥: 모든 것이 매끄럽고(매끄러움)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오직 '같음'만이 만연하는 '같음의 지옥' 이 펼쳐집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내면의 '괴로운 공허' 를 느끼며, 이는 '셀피 중독'이나 '자해' 와 같은 병리적 현상으로 이어집니다.

4. 대안으로서의 에로스: 타자의 부활

한병철은 이러한 '같음의 지옥'과 '나르시시스적 자기 관련' 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에로스'를 제시합니다.

"에로스가 우울을 이긴다"

우울증이 타인이 부재한 채 자기 자신에게 침몰하는 상태라면 , 에로스는 '완전한 타인'(他者)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측 불가능하고 나에게 저항하는 '타인의 부정성' 을 받아들이는 에로스적 경험만이, 우리를 나르시시즘적 수렁에서 건져내고 자본주의의 '죽음 충동'을 극복하게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역설합니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서평: "우리는 왜 스스로를 착취하며 소진되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피곤한가? 왜 끝없는 경쟁과 성과 압박 속에서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소진(burnout)'되는가? 그리고 이토록 불평등이 심화하는데도 왜 누구 하나 세상을 뒤집으려 하지 않는가? 한병철의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는 이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날카로운 철학적 진단서입니다.

저자는 오늘날 혁명이 불가능한 이유가 억압이 너무 강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규율사회가 외부의 억압자(자본가)에 의한 '타자 착취' 시스템이었다면, 현대의 신자유주의는 개인이 스스로를 경영하는 '성과사회'로 변모했습니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넌 할 수 있어"라는 긍정성의 주문 아래, 스스로를 착취하는 '주인이자 노예'가 됩니다. 실패는 사회 구조의 모순이 아닌 오롯이 '나의 무능' 탓이 되며 , 저항의 에너지는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우울증과 소진,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입니다.

한병철은 이 시스템이 '디지털 파놉티콘'을 통해 완성된다고 지적합니다. 과거의 감옥이 수감자를 '고립'시켰다면, 지금의 감옥은 '연결'을 강요합니다. 우리는 '좋아요' 버튼을 누르고 스스로를 전시하며 자발적으로 감시 체제에 동참합니다. 모든 것이 매끄럽고 긍정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투명사회'는 , 비밀과 낯섦, 다름이라는 '부정성'을 제거하며 우리를 '같음의 지옥' 으로 몰아넣습니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성장 강박을 '죽음 충동' 에 비유하며, 죽음을 부정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삶을 생기 없는 '생존'으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합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우리는 어쩌면 이미 살아있는 시체, 즉 '설죽은 삶'을 사는 좀비일지도 모릅니다.

책의 진단은 암울하지만, 한병철은 마지막에 작은 희미한 빛을 제시합니다. 바로 '에로스'입니다.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타자'를 만나는 경험, 즉 에로스적 관계만이 우리를 이 '괴로운 공허' 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는 현대 사회의 병증을 꿰뚫어 보는 압축적이고 예리한 선언문입니다. 읽는 내내 뼈를 때리는 듯 아프지만, 동시에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끝없는 자기계발과 성과 압박에 지쳐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라고 질문해 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