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읽는 사도신경』: 일상 속에서 만나는 교리의 신비
1. 덜컹거리는 일상과 묵상의 역설
지하철은 현대인의 일상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박물관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사실은 거대한 흐름에 떠밀려가는 피동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소란스럽고 흔들리는 공간인 지하철을 '묵상'의 장소로 제안합니다. 묵상(meditatio)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들어 올려 하나님의 진리 속으로 풀어놓는 행위입니다.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진리인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 이것은 떠밀려가는 삶에서 참된 자유를 얻는 유쾌한 반란입니다.
2.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
사도신경의 첫 고백은 하나님의 '전능'과 '아버지 되심'을 연결합니다. 과거의 번역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이라 하여 전능을 창조 능력에 국한시켰다면, 새 번역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로, 전능함을 아버지 되심의 성품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단순히 슈퍼 히어로 같은 능력이 아니라, 자녀를 위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절정은 아들을 내어주신 것에서 증명됩니다
3.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예수"는 구원자라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왕, 선지자, 제사장)라는 직분입니다. 우리는 종종 위대한 직분(그리스도)에만 집중하지만, 성경은 그 위대한 직분을 맡으신 분이 다름 아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예수'이심을 강조합니다. 사막의 수도사들이 고행을 통해 종교적 비범함에 도달했을지라도 그들에게 '사랑할 이웃'이 없었다면 그것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대의와 명분(그리스도)을 가지셨으되, 그 목적이 낮고 비참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예수)에 있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나를 위한 수양이 아니라, 이웃과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4. 동정녀 탄생, 성령 잉태와 불임의 나라
동정녀 탄생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핵심은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점입니다. 마리아는 수동적인 도구였고, 주체는 성령님이셨습니다. 이는 구원의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덮으심(over-shadowing)'은 구약의 쉐키나(하나님의 임재)와 룻기에서 보아스의 옷자락으로 룻을 덮는 보호의 이미지를 상기시킵니다. 즉, 성육신은 우리를 당신의 날개 아래로 품으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입니다. 동시에 동정녀 탄생은 '불임'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사라, 라헬, 한나 등 성경의 불임 여성들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생명을 낳았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생물학적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세워지는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5. 십자가란 무엇인가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생애(가르침, 기적)를 건너뛰고 곧바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넘어갑니다. 이는 예수님이 오신 주목적이 '속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낭만적인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았다"는 신명기의 말씀처럼, 철저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감당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광야 시험에서 사탄이 제안한 '고통 없는 쉬운 구원'을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연합이 끊어지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감상적으로 동정하거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감사하고 찬송해야 할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의 확증입니다.
6. 부활신앙으로 서는 우리의 삶
기독교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비밀(Mysterion)'입니다.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창출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태와 같은 사라에게서 생명을 얻은 것,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신 것, 그리고 죄로 죽었던 우리가 중생하여 새 생명을 얻은 것은 모두 동일한 부활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장차 부활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이미' 부활했습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죽음과 같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기독교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7. 주께서 승천을 통해 알려주려 하신 것
승천은 부활에 비해 소홀히 다뤄지지만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심으로써, 우리의 시선을 땅에서 하늘로 옮기게 하셨습니다. 칼빈은 승천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찾지 않고, 믿음으로 하늘에 계신 그분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승천은 성찬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합니다. 예배는 땅의 것을 하늘의 것으로 변모시키는 행위이며, 승천 신앙은 우리가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찾지 않게"(골 3:1) 하는 동력이 됩니다.
8. 심판의 역설
심판은 두려운 멸망으로 여겨지지만, 성경에서 심판은 종종 구원의 방편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옛 세상을 심판함과 동시에 노아 가족에게는 구원의 물(세례)이 되었습니다. 나훔서의 니느웨 심판은 유다에게 구원의 소식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원리는 '죽음 위에 생명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낡은 것이 파괴되어야 새것이 옵니다. 신자에게 최후의 심판은 세상의 멸망이 아니라, 죄와 악이 완전히 제거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소망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를 외치며 그날을 기다립니다.
9. 우리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어떤 기운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성부, 성자와 동등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령님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처럼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성령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를 소유하고 거처로 삼으신다고 말합니다
10. 성도의 교제란 무엇인가?
사도신경의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는 단순히 교인들 간의 친목 모임(coffee fellowship)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고백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1) 지상 성도와 천상 성인의 교제(가톨릭), 2) 거룩한 성도들 간의 교제(개신교), 3) 거룩한 것(성찬)에의 참여. 이 세 가지 견해의 공통점은 '거룩함'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인간적인 사귐 이전에,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룩해진 자들이 나누는 영적 교통입니다. 성경의 '코이노니아'는 복음 안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참여를 뜻합니다. 따라서 참된 성도의 교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11. 죄 사함과 거룩한 교회
사도신경에서 '죄 사함'은 기독론이 아니라 교회론("거룩한 공교회와...") 다음에 위치합니다. 이는 죄 사함이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고백입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키프리아누스의 말은, 하나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천국 열쇠)를 교회에 맡기셨음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죄 없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를 씻고 소멸시키는 곳입니다. 세상(바벨탑)은 죄를 억제할 뿐이지만, 교회(아브라함의 자손)는 대적의 성문을 취하고 죄를 정복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죄인이 있다는 사실에 실망하기보다, 교회가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기관임을 믿고 그 거룩성을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12. 나는 육의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혼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흙(육)과 생기(영)가 결합된 존재로 창조하셨기에, 영혼과 육체의 분리(죽음)는 비정상적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완성은 영혼의 구원을 넘어 '육체의 부활'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세례가 현재의 나를 죄에서 죽게 하듯이, 미래의 부활 소망은 현재의 나를 견실하게 하고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우리는 장차 썩지 않을 몸을 입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리적 세계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몸의 속량입니다.
13. 영원한 생명
영혼 불멸설은 헬라 철학의 산물이지 성경적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은 본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죽지 않으시는(Athanasia) 분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존재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서의 영원한 존속은 지옥 형벌일 뿐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하나님만의 속성인 '불사'를 부활할 성도들에게 적용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이 정복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서평] 지하철이라는 일상, 사도신경이라는 영원
"덜컹거리는 삶 속에서 영원을 붙잡다"
윤석준 목사의 『지하철에서 읽는 사도신경』은 제목부터 묘한 긴장감을 줍니다. '지하철'은 가장 세속적이고, 바쁘고, 피곤하며, 때로는 비인격적인 현대인의 일상을 대변합니다. 반면 '사도신경'은 가장 거룩하고, 고정되어 있으며,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는 공교회의 고백입니다. 저자는 이 이질적인 두 세계를 탁월한 신학적 통찰과 따뜻한 감성으로 연결해냅니다.
1. 일상에 뿌리내린 신학의 정수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신학의 일상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딱딱한 교리 해설에 머물지 않고, 아브라함의 불임, 노아의 홍수, 그리고 우리네 삶의 결핍과 고통을 사도신경의 조항들과 연결합니다. 예를 들어, '동정녀 탄생'을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불임)에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설명하는 대목은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또한 '전능하사'를 객관적 능력이 아닌 '우리 아버지'의 사랑으로 풀어내는 부분은 지쳐 있는 현대인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2. 깊이 있는 개혁주의 신학의 통찰 가볍게 읽히지만 결코 가벼운 책은 아닙니다. 저자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그리고 초기 교부들의 신학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사도신경의 진의를 파고듭니다. 특히 한국 교회가 놓치고 있는 '승천'의 의미나, '성도의 교제'를 사람 간의 친교로 축소하는 것에 대한 비판, 그리고 '죄 사함'이 교회의 권세와 연결되어 있다는 지적은 매우 뼈아프면서도 시의적절합니다. 감성에 호소하는 에세이류의 신앙 서적과는 차원이 다른 묵직한 신학적 뼈대가 책 전체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3. 보는 즐거움, 한동현의 일러스트 한동현 작가의 일러스트는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듭니다. 그의 그림은 텍스트의 보조 수단을 넘어, 그 자체로 깊은 묵상을 이끌어내는 도구가 됩니다. 지하철 풍경 속에 녹아든 성경적 상징들은 글이 다 전하지 못한 여백의 미를 채워주며, 독자로 하여금 잠시 책을 덮고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이토록 유기적으로 결합된 신학 서적은 드뭅니다.
4. 마이클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어릴 적 시골 버스 '마이클'을 기다리던 추억을 소환합니다. 흙먼지 날리는 도로에서 팽이치기를 하다가도 버스가 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올라타야 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대합실과 같습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땅따먹기에 정신이 팔려 다가오는 버스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지하철에서 읽는 사도신경』은 흔들리는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우리에게, 잠시 눈을 들어 차창 밖의 하늘을, 아니 우리 삶을 뚫고 들어오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교리에 목마른 신자, 일상에 지친 성도, 그리고 타성에 젖은 목회자 모두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