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에 담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 김진혁,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
1. 현대인을 위한 고대 교회의 유산, 사도신경
현대 사회는 개인의 감정과 주관적 경험을 중시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고백 위에 서 있다. 김진혁 교수의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는 사도신경(Symbolum Apostolorum)이 단순한 교리적 나열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가 로마라는 다신교적 문명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백했던 '신앙의 문법'임을 밝힌다. 사도신경은 "나는 믿습니다(Credo)"로 시작하지만, 이는 고립된 개인의 신념이 아닌 거룩한 공교회의 일원으로서 드리는 고백이다. 저자는 '기도의 규칙이 곧 신앙의 규칙(Lex orandi, lex credendi)'이라는 원리를 통해, 교리가 딱딱한 이론이 아니라 예배와 삶 속에서 녹아나는 생명력 있는 진리임을 강조한다. 이 책은 사도신경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떻게 우리의 지성을 넘어 미적 체험과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탐구한다.
2.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와 창조의 신비
사도신경의 첫 번째 고백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유일신론과 삼위일체론의 결합이다.
유일신론의 혁명: 고대 이스라엘은 다신교적 환경 속에서 오직 야웨 하나님만을 섬기는 '택일신론(Henotheism)'에서 시작하여, 바빌로니아 포로기를 거치며 전 우주적 통치자이자 창조주이신 유일신 사상으로 발전했다. 이는 단순한 숫자적 하나(one)가 아니라,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의 도약이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추상적인 '신(Deus)'이 아니라 '아버지(Pater)'로 고백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부르셨던 호칭이며,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전제한다. 하나님은 군림하는 폭군이 아니라,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신성을 선물로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시다.
전능함의 재정의: '전능하사(Omnipotentem)'는 무소불위의 폭력이 아니다.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전능함은 타자(아들과 피조물)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자 '자기 수여(Self-giving)'의 힘이다. 진정한 전능은 십자가와 같이 약함 속에서도 사랑을 완성하는 능력이다.
창조의 의미: 하나님은 결핍 때문에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충만한 사랑이 흘러넘쳐 세상이라는 타자에게 존재를 선물한 것이 바로 창조다. 따라서 기독교의 창조론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인 동시에, 말씀(Logos)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질서와 아름다움의 부여다.
3. 예수 그리스도: 역사 속에 들어온 구원
사도신경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이다. 이는 초기 교회가 예수의 정체성(신성과 인성)을 확립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는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와 동일한 본질(homoousios)을 지닌 참 하나님이다. 니케아 신경이 고백하듯 그는 "나셨으나 만들어지지 않으신" 분이다. 이는 영원 속에서 성부와 사랑을 나누시는 관계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 구절은 예수의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을 동시에 확증한다. 특히 마리아의 순종("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은 에덴동산에서 하와의 불순종을 역전시키는 구원 역사의 시작점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 구체적인 육체(sarx)를 입고 들어오셨음을(성육신) 보여준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빌라도라는 세속 권력자의 이름이 신앙고백에 포함된 것은 기독교 신앙의 '역사성'을 담보한다. 예수는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고난당했다. 빌라도의 재판은 인간의 정치적 권력과 하나님의 진리가 충돌하는 장소였으며, 죄 없으신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에게 심판받는 역설을 보여준다.
십자가와 죽음: 십자가는 단순한 사형 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한 최고의 사랑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단절(무신론적 체험)까지 겪으셨으나, 이는 인류의 죄와 절망을 끌어안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다.
음부로 내려가심: (한국어 사도신경에는 생략되었으나) 고대 신조에 포함된 '음부 강하'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가장 깊은 곳, 하나님 부재의 자리까지 내려가셔서 죽은 자들에게도 소망이 되셨음을 의미한다. 성 토요일의 침묵은 절망이 아니라, 지옥의 문을 부수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는 승리의 준비 과정이다.
4. 인간: 그리스도를 통해 본 참사람의 길
사도신경에는 '인간론'이라는 별도의 항목이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누구인가를 가장 잘 드러낸다. 인간은 스스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피조물로서의 인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피조 세계를 돌보고(왕적 기능), 피조물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제사장적 기능) 존재임을 뜻한다. 현대 신학은 이를 관계적 존재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수동태적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삶(잉태되시고,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되시고)이 수동태로 묘사되듯,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동태적 존재(Passivity)다.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주체성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인간됨의 기초다.
죄인인 인간: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왜곡된 욕망을 가진 존재다(원죄). 그러나 그리스도는 '참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셨다. 따라서 기독교적 인간 이해의 기준은 타락한 아담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5. 성령과 교회: 거룩한 사귐의 신비
성령론과 교회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고백은 곧바로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로 이어진다.
사랑의 띠인 성령: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의 끈이다. 창조 세계와 구원 역사 속에서 성령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현재화(Present)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교회의 본질: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거룩'하다. 이는 도덕적 완벽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별되어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보편적(Catholic)'이다. 인종, 계급, 성별을 넘어 모든 이를 포용하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성도의 교제: 이는 '거룩한 사람들의 사귐(Sanctorum Communio)'인 동시에 '거룩한 것들(성만찬 등)의 나눔'을 의미한다. 교회는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며, 타자를 환대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종말론적 공동체다. 개인주의적 신앙은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된다.
6. 죄 사함: 구원의 풍성한 의미
구원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은혜다. 사도신경은 이를 "죄를 용서받는 것"으로 요약한다.
구원의 다양한 이미지: 기독교 전통은 구원을 법정적 '칭의(Justification)'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죄와 죽음의 세력을 멸하신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신화(Deification/Theosis)', 병든 영혼을 고치시는 '치유' 등 다양한 메타포가 존재한다.
세례와 죄 사함: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고백한다. 세례는 개인의 결단을 넘어, 죄의 굴레를 끊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접붙여지는 객관적인 은혜의 사건이다.
은혜의 선행성: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죄 사함은 과거의 청산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다.
7. 종말: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
기독교 신앙은 종말론적이다. 사도신경의 마지막은 "몸의 부활과 영생"을 향한 기다림으로 끝난다.
몸의 부활: 영지주의적 영혼 불멸설과 달리, 기독교는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 이는 창조 세계(물질)를 긍정하는 신앙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몸이 변화되었듯, 우리의 썩을 몸도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소생이 아니라 '새 창조'의 완성이다.
영원한 삶: 영생은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 아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교제(Perichoresis)에 참여하는 것이다. 죽음 너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Visio Dei)' 지복직관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아멘의 의미: 사도신경은 "아멘"으로 마친다. 이는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동의이자, 그 약속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결단이다. 종말론적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력이다.
[서평] 교리의 화석에서 생동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21세기에 다시 읽는 1세기의 고백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사도신경은 예배 시간에 습관적으로 암송하는 주문이나, 낡은 교리의 화석처럼 여겨지곤 한다. 김진혁 교수의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는 이러한 타성에 젖은 신앙에 경종을 울리며, 사도신경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고 강력한 삶의 지침임을 웅변한다. 저자는 고대 교부들의 신학적 통찰과 현대의 인문학적 지성을 탁월하게 융합하여, 사도신경의 각 조항을 현대인의 언어로 아름답게 번역해 낸다.
삼위일체론적 해석의 탁월함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사도신경의 모든 조항을 철저히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풀어낸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전능한 독재자가 아닌, 성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아버지로 묘사하는 대목은 압권이다. 하나님의 전능함을 '힘의 논리'가 아닌 '사랑의 능력'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고통받는 세상 속에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위로와 신학적 해답을 제시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성부와 성자의 단절과 일치라는 드라마틱한 관계성 속에서 설명하며, 구원이 단순한 죄 씻음을 넘어 삼위 하나님의 교제 안으로의 초대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아름다움으로서의 신학 김진혁 교수는 신학이 건조한 논리가 아니라 '아름다움(Beauty)'을 추구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신학적 진술 속에 담긴 미적 차원을 포착해 낸다. 질서 정연한 우주의 창조, 성육신의 겸손, 부활의 영광은 그 자체로 숭고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저자는 단테의 《신곡》,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각종 명화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적재적소에 인용하며 교리 해설을 한 편의 예술 감상처럼 풍성하게 만든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머리로만 이해하는 신앙을 넘어, 가슴으로 느끼고 감탄하는 신앙으로 나아가게 한다.
공동체와 공공성의 회복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이 책은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강조하며 신앙의 공공성을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나는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실은 "우리는 믿습니다"라는 공동체적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통찰은, '나홀로 신앙'에 익숙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뼈아픈 지적이자 따뜻한 초대가 된다. 교회는 완벽한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이 서로를 용납하며 삼위 하나님의 환대를 실천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한다.
삶으로 번역되어야 할 고백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는 사도신경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 치열하게 살아내야 할 '현재 진행형의 진리'임을 역설한다. 부활과 영생의 소망은 죽음 이후의 보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죽음의 문화를 거스르고 생명을 살리는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이 책은 신학적 깊이와 인문학적 소양, 그리고 목회적 따뜻함을 겸비한 수작이다. 자신의 신앙 내용을 점검하고 싶은 평신도, 설교의 깊이를 더하고 싶은 목회자,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맛보고 싶은 모든 탐구자에게 이 책은 친절하고도 권위 있는 안내자가 되어줄 것이다. 사도신경의 "아멘"이 입술의 고백을 넘어 삶의 고백이 되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