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의 『고백의 언어들』: 고통과 침묵 속에서 피어난 신앙의 고백
1. 책 소개 및 서론: 하나님 체험의 다층적 지평
이 책은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가 43년의 목회 여정을 마무리하며 남긴 신앙 고백록이자, 함석헌 선생의 시 「하나님」을 모티프 삼아 전개한 신학적 성찰입니다. 저자는 신학적 개념보다는 문학, 예술, 철학,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구도자의 여정을 그려냅니다. 단순한 교리 해설서가 아니라, 삶의 비루함과 고통, 그리고 그 너머의 신비를 통합하려는 치열한 사유의 결과물입니다
2. 첫 번째 강의: 인간이라는 수수께끼 - 유한함 속의 무한을 향한 그리움
2.1. 인간 존재의 이중성과 불안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나 무한하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존재입니다. 저자는 인간을 '육'(본능), '혼'(이성/도덕), '영'(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설명하며, 영이 이끄는 삶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삶이라 정의합니다
2.2. 성경의 창조 이야기 vs. 제국의 신화
고대 바벨론 신화 「에누마 엘리시」가 폭력과 살해를 통한 창조를 말하며 인간을 신의 노예로 규정하는 반면,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폭력이 배제된 '말씀'과 '보시기에 좋았다'는 감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3. 타락과 죄: 자기중심성으로의 함몰
저자는 죄를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마음'으로 정의합니다. 선악과 사건은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판단 주체가 되어 타자를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갖게 된 사건입니다
3. 두 번째 강의: 하나님 안에서 태어나다 - 고난과 섭리의 변주
3.1. 한계상황과 실존적 도약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한계상황'(죽음, 고통, 죄책감 등)에 직면합니다. 이때 절망하여 무너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한계를 딛고 더 큰 세계로 도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3.2. 아브라함과 오디세우스: 떠남의 영성
저자는 헬레니즘의 오디세우스와 헤브라이즘의 아브라함을 대조합니다. 오디세우스가 모험 끝에 자기 자신(고향)으로 회귀하여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존재라면, 아브라함은 익숙한 세계를 떠나 낯선 곳으로 나아가며 자기를 타자에게 선물로 주는 존재입니다
3.3. 요셉 이야기: 섭리와 해석학
요셉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재해석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고백은,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치유하고 가해자를 용서하며 상생의 길을 여는 신앙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4. 세 번째 강의: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다 - 광야에서의 연단
4.1. 제국에 대한 저항과 출애굽
출애굽 사건은 단순히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인간을 부속품으로 취급하는 제국의 질서(숙명론)로부터 탈출하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자유와 해방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혁명적 사건입니다
4.2. 만나의 경제학: 탐욕을 넘어선 나눔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는 '필요'를 채우는 양식이지 '축적'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제 법칙은, 오늘날 자본주의적 탐욕에 젖은 우리에게 '자족'과 '나눔'의 삶을 요청합니다
4.3. 낯섦을 환대하는 신앙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듯, 성경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환대할 것을 명령합니다. 저자는 롯이 소돔 성에서 나그네를 보호하려다 겪은 곤경을 통해, 배타적인 세상에서 타자를 환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지만 고귀한 일인지를 역설합니다
5. 네 번째 강의: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다 - 일상의 성화와 거룩
5.1. 거룩의 정치학 vs. 자비의 정치학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정결법을 통해 사람들을 거룩한 자와 속된 자로 나누고 차별하는 '거룩의 정치학'을 펼쳤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시며 경계를 허무는 '자비의 정치학'을 실천하셨습니다
5.2. 기도의 본질: 하나님의 마음으로 조율하기
기도는 나의 욕망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오케스트라가 연주 전 기준음(A음)에 맞춰 악기를 조율하듯, 나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자비, 공의, 사랑)에 맞추는 조율의 시간입니다
5.3. 일상의 성화(Sanctification of Everyday Life)
거룩함은 교회라는 특정한 공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 줍기」가 보여주듯,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현장, 이웃과 밥을 나누는 식탁, 고통받는 이의 손을 잡아주는 그곳이 바로 거룩한 성소입니다
6. 다섯 번째 강의: 나의 인생, 나의 하나님 - 고통과 침묵 너머의 신뢰
6.1. 욥의 고난과 하나님의 침묵
의인 욥이 겪은 까닭 없는 고난은 인과응보의 도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앙의 난제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전통적인 교리로 욥을 정죄하지만,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절규합니다
6.2. 신의 일식(Eclipse of God)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부버의 표현처럼, 때로 하나님은 일식처럼 가려져 보이지 않는 '부재의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영혼의 어둔 밤'을 통과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만든 하나님(우상)을 깨뜨리고 참된 하나님(절대 타자)을 만나게 됩니다
6.3. 가능주의자(Possibilist)로 살아가기
나희덕 시인의 시 「가능주의자」를 인용하며, 저자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불가능의 가능성'을 믿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서평] 침묵하는 하늘과 신음하는 땅 사이에서, 고백의 언어를 찾다
1. 확신의 언어가 아닌, 떨림의 언어로
서점가에 넘쳐나는 기독교 서적들은 대게 '확신'을 팝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이것이 축복의 비결이다"라는 명쾌한 공식들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은 그러한 공식으로 풀리지 않는 변수들로 가득합니다. 김기석 목사의 『고백의 언어들』은 이러한 값싼 확신을 거부합니다. 대신 저자는 "하나님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고 고백하며, 떨림과 머뭇거림의 언어로 신비이신 하나님께 다가갑니다. 이 책은 평생을 구도자로 살아온 한 목회자가 은퇴를 앞두고 길어 올린, 깊고 맑은 우물과도 같습니다.
2. 인문학적 통찰로 빚어낸 신학의 깊이
김기석 목사의 설교와 글이 가진 가장 큰 힘은 '경계 넘기'에 있습니다. 그는 성경 텍스트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렘브란트와 샤갈의 그림, 도스토옙스키와 카잔차키스의 소설, 함석헌과 나희덕의 시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성경의 진리를 입체적으로 조명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창세기 22장)을 다룰 때, 저자는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대신 렘브란트의 그림 네 점을 시기순으로 보여줍니다. 렘브란트의 생애와 겹쳐지며 변화하는 아브라함의 표정—확신에서 고뇌로, 그리고 체념 섞인 순종으로—을 통해 우리는 믿음이 단색이 아니라 수만 가지 색을 띤 실존적 고투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인문학적 접근은 신앙을 교회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고뇌의 현장으로 확장시킵니다.
3. 고통의 문제와 욥기: 신정론을 넘어 공감으로
이 책의 백미는 후반부 '욥기'에 대한 해석입니다. 저자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고통받는 자를 정죄하는 '욥의 친구들'의 태도가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과 닮아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교리적으로 옳은 말을 했던 친구들이 아니라, 거칠고 불경해 보일지라도 자신의 고통을 정직하게 토로하며 하나님께 따져 묻는 욥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저자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설교나 해석이 아니라, 그 곁에 함께 있어 주는 침묵과 공감"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 등 사회적 비극 앞에서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거룩의 정치학'으로 타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정치학'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품어 안는 것이야말로 예수를 따르는 길임을 역설합니다.
4. 어둠 속의 반딧불이가 되어
책의 말미에 인용된 나희덕 시인의 「가능주의자」는 이 책의 결론과도 같습니다.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하나님의 정의는 지연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에게 '가능주의자(Possibilist)'가 되자고 제안합니다. 거창한 승리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반딧불이처럼, 척박한 담벼락을 오르는 담쟁이처럼, 포기하지 않고 사랑과 생명의 길을 걷자고 말입니다.
『고백의 언어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인생이 버겁고, 신의 침묵 앞에 당혹스러워하는 모든 현대인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이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죽비입니다. 쉬운 답을 주는 대신, 더 깊은 질문을 품게 만드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자신의 삶과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야릇한 지혜의 뚫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