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전(超限戰): 모든 경계를 넘어선 21세기 전쟁의 새로운 패러다임
1. 세계화 시대, 전쟁의 개념이 바뀌다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대령 출신인 챠오량(喬良)과 왕상수이(王湘穂)가 집필한 《초한전(Wars Beyond Limits)》은 1999년 출간 당시, 9.11 테러를 예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전 세계 군사 및 안보 전문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단순히 군사 기술의 발전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에 전쟁의 정의 자체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통찰한다. 저자들은 전쟁이 더 이상 군인과 무기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정치, 경제, 문화, 기술 등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선언한다. 즉, ‘초한전(Unrestricted Warfare)’이란 모든 한계와 경계를 초월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새로운 전쟁 방식을 의미한다
2. 제1부: 새로운 전쟁 - 전쟁의 신(神)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2.1. 무기 혁명과 군사 혁명의 관계
역사적으로 무기의 혁명은 언제나 군사 혁명보다 선행해 왔다. 청동기에서 철기로, 냉병기에서 화기로의 전환은 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기술의 발전은 단일 무기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시대를 종식시켰다. 저자들은 ‘첨단 기술 전쟁’이나 ‘정보전’이라는 용어조차 전쟁의 본질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기술의 융합: 현대 기술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종합적으로 운용된다. 정보 기술은 모든 기술을 연결하는 접착제 역할을 하며, 무기의 지능화와 구조적 변화를 이끌었다
. 무기의 자애로움(慈化): 과거 무기 개발이 살상력의 극대화를 추구했다면(핵무기 등), 현대는 비살상 무기와 정밀 타격 무기를 통해 불필요한 살상을 줄이고 목표를 정확히 제압하는 ‘자애로운(Kinder)’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전쟁의 윤리와 가치관이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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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전쟁의 얼굴이 바뀌다: 군인, 전장, 무기의 모호성
전통적인 전쟁의 3요소인 군인, 무기, 전장의 개념이 해체되고 있다.
전장의 확대: 전쟁은 더 이상 물리적 공간인 육·해·공·우주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자 공간(사이버 공간), 금융 시장, 미디어, 심지어 인간의 심리까지 전장이 된다. 저자들은 “모든 곳이 전장이다”라고 선언한다
. 전투원의 시민화: 전쟁의 주체가 직업 군인에서 해커, 금융 투기꾼, 테러리스트, 미디어 재벌 등으로 확장되었다. 조지 소로스가 동남아시아 금융 위기를 촉발한 것은 금융을 이용한 비군사적 전쟁 행위로 간주된다. 10대 해커가 미 국방부 네트워크를 침입하는 것 또한 전쟁 행위가 될 수 있다
. 전쟁 목적의 복잡성: 과거 전쟁이 영토나 자원 획득과 같은 단순한 목적을 가졌다면, 현대전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적 이익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걸프전은 석유, 신국제질서, 정의 구현 등 다양한 목적이 혼재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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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걸프전: 구시대의 마지막 전쟁이자 새 시대의 서막
저자들은 1991년 걸프전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며 이를 ‘세상을 바꾼 전쟁’이자 ‘전쟁 자체를 바꾼 전쟁’으로 평가한다
이슬(Overnight) 동맹: 걸프전의 동맹은 이념이 아닌 철저한 ‘이익’을 기반으로 형성된 일시적 동맹이었다. 이는 현대 동맹이 얼마나 가변적이고 실리적인지 보여준다
. 공중전의 승리: 걸프전은 공중 폭격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미군은 이를 통해 ‘기술 만능주의’와 ‘사상자 0명’이라는 강박에 빠지게 되었다
. 미디어의 역할: CNN을 비롯한 서구 언론은 전쟁의 실시간 중계자가 아니라 전쟁의 직접적인 참여자가 되었다. 그들은 여론을 조작하고 심리전을 수행하며 이라크를 도덕적으로 고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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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2부: 새로운 전법 - 승리를 위한 파격의 미학
3.1. 미국은 코끼리를 만져서 무엇을 얻었는가?
미국은 걸프전 승리 이후 군사 혁신(RMA)에 박차를 가했지만, 저자들은 미국의 접근 방식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기술적 우위에만 집착하여, 전쟁의 본질적인 변화인 ‘비군사적 전쟁’의 위협을 간과하고 있다
기술 편중의 오류: 미군은 디지털 부대 건설과 첨단 무기 개발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그러나 빈 라덴과 같은 테러리스트나 해커, 금융 투기꾼과 같은 비대칭적 위협에는 속수무책일 수 있다. 저자들은 이를 “미국이 이해하는 주파수 대역폭을 초과한 적”이라고 표현한다
. 군종 이기주의: 육·해·공군은 각자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합동성’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예산 확보 경쟁에 몰두하고 있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통합 전력 발휘를 저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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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승리의 규율: 황금률(0.618)과 편정률(偏正律)
저자들은 전쟁 승리의 기저에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규율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황금률의 적용: 피타고라스의 황금비(0.618)는 예술뿐만 아니라 전쟁사에서도 발견된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실패 시점,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환점, 걸프전 지상군 투입 시점 등은 모두 전체 기간의 약 0.618 지점과 일치한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는다
. 편정률(偏正律): 중국어 문법 구조인 편정(수식어+중심어) 관계를 전쟁에 대입한다. 전쟁의 요소 중 ‘정(正, 주체)’이 아니라 ‘편(偏, 주도적 수식어)’이 승패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비대칭적이고 의외인 요소(기습, 신무기, 새로운 전법)가 주도권을 잡을 때 승리한다는 원리다. 이는 손자병법의 ‘기정(奇正)’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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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초한조합(超限組合):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결합
초한전의 핵심 전법은 ‘조합(Combination)’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전쟁과 관련된 모든 요소를 제한 없이 섞고 연결해야 한다.
초국가 조합: 국가뿐만 아니라 초국가 기구(UN, WTO), 다국적 기업, 비정부 기구(NGO), 테러 조직, 해커 집단 등을 전쟁 수행의 주체로 활용한다
. 초영역 조합: 군사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외교, 문화, 종교, 기술 등 모든 사회적 영역을 전장으로 삼아 복합적인 타격을 가한다. 예를 들어, ‘군사적 압박 + 경제 제재 + 외교적 고립 + 미디어 선전’을 동시에 구사하는 것이다
. 초수단 조합: 군사적 수단과 비군사적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목표 달성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금융 시장 교란, 컴퓨터 바이러스 유포, 법률전(Lawfare), 생태전 등을 군사 작전과 배합한다
. 초단계 조합: 전술, 전역, 전략의 전통적인 단계를 파괴한다. 해커 한 명(전술적 요소)이 국가 안보 시스템(전략적 목표)을 마비시킬 수 있는 것처럼, 하위 단계의 행동이 상위 단계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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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초한전의 필수 원칙
저자들은 새로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8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이는 승리를 보장하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필요조건이다
전방향(Omnidirectionality): 360도, 즉 가시적/비가시적 공간, 군사/비군사 영역을 모두 관찰하고 활용하라
. 공시성(Synchrony): 서로 다른 영역에서 동시에 다발적인 행동을 취해 적을 마비시켜라. 시간차 공격이 아닌 동시간대 집중 타격이 중요하다
. 제한된 목표(Limited Objectives): 자신의 수단을 초과하는 무한한 목표를 세우지 마라. 목표는 명확하고 달성 가능해야 한다
. 무한 수단(Unlimited Means): 목표는 제한하되,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제한 없이(군사+비군사, 합법+불법) 사용하라
. 비균형(Asymmetry): 적의 강점은 피하고 약점을 찌르는 비대칭적 전력을 운용하라. 강대국을 상대하는 약소국이나 비국가 조직의 필수 생존 전략이다
. 최소 비용(Minimal Consumption):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합리적인 수단을 선택하라
. 다차원 협동(Multidimensional Coordination): 군사적 차원뿐만 아니라 비군사적 차원의 모든 역량을 하나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게 하라
. 전 과정 통제(Adjustment and Control of the Entire Process):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정보를 획득하고 상황에 맞춰 행동을 수정하며 주도권을 유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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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계화 시대, 누구도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세계화는 국가 간의 상호 의존성을 높였지만, 동시에 전쟁의 수단을 다양화하고 파괴력을 증대시켰다. 이제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정의를 넘어선다. 금융 위기나 사이버 테러처럼 피를 흘리지 않지만 국가를 파멸시킬 수 있는 ‘비군사 전쟁 행동’이 주류가 될 것이다.
저자들은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이 기술적 우위에만 취해 ‘초한전’이라는 새로운 위협을 직시하지 못하면, 로마 제국처럼 쇠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반대로 약소국이나 비국가 조직은 이러한 비대칭적 수단과 무제한적 조합을 통해 강대국을 굴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결국 21세기의 승리자는 낡은 전쟁의 규칙을 타파하고, 모든 경계를 넘어선 ‘초한전’의 사고방식을 갖춘 자가 될 것이다
[서평] 규칙 없는 전쟁의 서막, 《초한전》이 던지는 충격적 메시지
1. 9.11 테러를 예견한 현대의 손자병법
1999년 출간된 《초한전》은 단순한 군사 이론서가 아니다. 이 책은 21세기 안보 환경을 꿰뚫어 본 예언서이자, 강대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던지는 약자들의 치명적인 도전장이다. 저자인 챠오량과 왕상수이는 9.11 테러가 발생하기 2년 전, 이미 “빈 라덴과 같은 비국가 조직이 첨단 기술과 결합하여 초강대국 미국을 타격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2. 미국 중심의 사고에 대한 통렬한 비판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냉전 이후 유일 패권국이 된 미국의 군사 전략을 철저히 해부하고 비판한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미국이 걸프전의 승리에 도취되어 ‘기술 만능주의’와 ‘사상자 없는 전쟁’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3. 전쟁의 정의를 다시 쓰다: 모든 것이 무기다
《초한전》이 제시하는 가장 혁명적인 메시지는 “전쟁과 비전쟁, 군사와 비군사의 경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4. 도덕적 논란과 냉혹한 현실주의
이 책은 출간 직후 ‘테러리즘을 옹호한다’거나 ‘수단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5. 한국의 안보 현실에 주는 시사점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군사적 긴장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다. 북한은 핵무기라는 비대칭 전력뿐만 아니라 해킹, 사이버 테러, 가짜 뉴스 유포 등 다양한 ‘초한전’적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미-중 패권 경쟁 사이에서 경제적, 외교적 압박이라는 비군사적 전쟁의 위협에도 노출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초한전》은 한국의 정책 결정자와 군 관계자,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재래식 군사력 확보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금융 위기, 사이버 마비, 무역 보복과 같은 비군사적 위협을 ‘전쟁’ 차원에서 인식하고 대비하고 있는가? “나라가 강할지라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천하가 평안할지라도 전쟁을 망각한다면 반드시 위태로움이 있다”는 사마양저의 말처럼
결론적으로 《초한전》은 21세기의 《손자병법》이다. 기술과 세계화가 만들어낸 복잡계(Complex System)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서이자, 현대 전쟁의 이면을 파헤친 날카로운 보고서다. 안보와 전략, 그리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