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권, 『자비 경제학』: 무한 경쟁 시대를 치유하는 하나님 나라의 경제 원리
1. 고용 없는 성장 시대와 자비 경제학의 필요성
현대 사회, 특히 대한민국은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와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구조적 모순에 직면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기업의 성장이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를 통해 가계 소득 증대나 고용 창출로 이어지지 않는 현상이 고착화되었습니다
이 책 『자비 경제학』은 구약성경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메시지, 그리고 고대 근동의 역사적 배경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대안적 경제 원리를 모색합니다. 저자는 경제(Economy)의 어원인 '오이코노미아(oikonomia)'가 가정 살림살이를 뜻하듯, 경제학은 본래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자비와 공평의 활동이어야 한다고 정의합니다
2.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따뜻한 자본주의의 재발견
많은 이들이 애덤 스미스를 '보이지 않는 손'을 주창한 냉혹한 시장주의의 원조로 오해하지만, 저자는 스미스의 또 다른 저작 『도덕감정론』을 통해 그가 추구했던 진정한 자본주의의 정신을 복원합니다.
2.1. 공감(Sympathy)의 원리
애덤 스미스는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인 동시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도덕적 존재로 파악했습니다. 시장 경제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무자비한 경쟁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느끼는 '공감'과 '동정심'이라는 도덕적 기초입니다
2.2. 공정한 관찰자 (Impartial Spectator)
스미스는 인간 내면에 '공정한 관찰자'가 존재하여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이기심을 제어한다고 보았습니다
3.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형평(衡平)과 자비 통치
구약성경의 경제법은 진공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의 법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저자는 수메르와 바벨론 등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존재했던 사회적 형평 운동을 분석하여 성경의 희년 사상과의 연관성을 추적합니다.
3.1. 메샤룸(Misharum)과 안두라룸(Andurarum)
고대 근동의 왕들은 즉위 초나 특정 시기에 '메샤룸'이나 '안두라룸'으로 불리는 자비 칙령을 선포했습니다
정치적 목적: 왕은 이를 통해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고, 세수와 국방력의 원천인 자유농민층을 보호하여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 종교적 배경: 왕들은 자신이 신(정의의 신 샤마쉬 등)의 대리자로서 우주의 질서인 정의를 땅에 실현한다는 명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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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구약성경과의 관계
이스라엘의 안식년과 희년 법은 이러한 고대 근동의 자비 법령 전통을 계승하되, 이를 왕의 자의적인 시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구적인 언약법으로 승화시켰습니다
4. 모세오경의 사회적 형평 율법: 안식년과 희년
모세오경, 특히 레위기와 신명기에 나타난 토지법과 경제법은 '자비 경제학'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4.1. 토지 신학: 땅은 하나님의 것
구약 경제학의 대전제는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 너희는 나그네요 동거하는 자"(레 25:23)라는 선언입니다
4.2. 안식년과 면제년 (The Sabbath Year)
휴경: 7년마다 땅을 쉬게 하여 지력을 회복시키고, 휴경지의 소출을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이 먹게 합니다
. 부채 탕감: 매 7년 끝에 빚을 면제해주어(신 15장) 채무로 인한 영구적 빈곤의 굴레를 끊습니다
. 노예 해방: 히브리 노예는 6년 봉사 후 7년째에 자유를 얻습니다.
4.3. 희년 (The Jubilee)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은 사회적 리셋(Reset) 버튼입니다.
토지 반환: 빚 때문에 팔았던 땅을 원주인(원래 가문)에게 되돌려줍니다. 이는 가난의 대물림을 막고 초기 출발선을 평등하게 맞추는 제도입니다
. 자유 선포: 모든 종된 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희년은 단순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지향하는 '구조적 정의'와 '공평'이 실현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5. 예언자들의 외침: 경제적 정의가 곧 신앙이다
주전 8세기 예언자들(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은 종교적 제의에는 열심이지만 사회적 정의는 짓밟는 이스라엘의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5.1. 자유농민 옹호 경제학
예언자들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토지를 강탈하여 거대한 대농장(Latifundia)을 만들고, 농민들을 소작농이나 노예로 전락시키는 현실을 고발했습니다
아모스: 가난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적 상행위를 규탄했습니다
. 이사야: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는 자들"(사 5:8)에게 화를 선포하며, 부동산 독점을 하나님의 심판 대상으로 규정했습니다
. 미가: 권력층이 침상에서 악을 꾀하고 날이 밝으면 밭과 집을 강탈하는 것을 '식인 행위'(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꺾음)에 비유하며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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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예배와 정의의 일치
예언자들에게 경제 정의는 사회 문제인 동시에 신학적 문제입니다. 공평과 정의(미쉬파트와 체데크)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헛된 제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곧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실천입니다
6. 십계명 제1계명의 사회경제적 함의: 우상숭배와 경제
저자는 십계명의 제1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를 경제적 관점에서 재해석합니다.
6.1. 바알 숭배와 토지 사유화
이스라엘이 숭배한 '바알'은 풍요의 신인 동시에, 탐욕스러운 토지 사유화를 정당화하는 가나안의 경제 시스템을 상징합니다. 오므리 왕조와 아합 왕은 바알 숭배를 통해 나봇과 같은 자유농민의 토지를 강탈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6.2. 제1계명은 경제 헌법이다
따라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히 종교적인 배타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탐욕과 수탈을 정당화하는 이방의 경제 체제(맘모니즘)를 거부하고, 야훼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지배하는 경제 질서를 따르라는 '경제 헌법'입니다
7. 기본소득의 두 토대: 자연법과 구약성경
저자는 구약의 희년 사상을 현대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으로 '기본소득(Basic Income)'을 제시합니다.
7.1. 자연법적 토대 (토마스 페인)
18세기 사상가 토마스 페인은 『농경지 정의』에서 대지(Land)는 인류의 공유 자산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는 토지 사유제로 인해 땅을 잃은 사람들에게 지주들이 걷은 지대(Rent)의 일부를 '국민기금'으로 조성하여 배당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7.2. 성경적 토대 (토지 공개념)
구약성경 역시 땅이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지파와 가족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함을 명시합니다. 땅이 없는 레위인, 고아, 과부, 나그네도 토지 소출의 십일조를 통해 생존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저자는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는 말씀을 근거로, 국가가 모든 국민의 최소한의 생존과 존엄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을 실시하는 것이 성경적 정의에 부합한다고 주장합니다
8. 치유와 회복을 위한 비전
김회권 저자는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가 개인 구원에만 함몰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경제 정의를 세상에 구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아우성을 들으시는 분이며, 성경의 하나님은 형이상학적 신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적 하나님'입니다
[서평] 성경적 경제 정의, 자본주의의 야만을 치유할 오래된 미래
김회권 교수의 『자비 경제학』은 맘모니즘(물신숭배)이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던지는 강력한 예언자적 경고이자, 동시에 따뜻한 치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경제학을 차가운 숫자의 학문이 아닌,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살림의 학문'으로 재정의한다. 저자는 구약성경의 율법과 예언서, 그리고 고대 근동의 역사적 자료들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하나님 나라의 경제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토지 정의'와 '분배 정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1. 신앙과 경제의 분리를 거부하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신앙과 경제를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타파한다는 점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 안에서는 신앙인으로, 사회에서는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에 순응하는 경제인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저자는 십계명의 제1계명("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을 재해석하며, 경제 정의를 외면하고 부동산 투기와 탐욕에 편승하는 것이야말로 현대판 '바알 숭배'임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2. 희년 사상과 기본소득의 연결
저자는 구약의 희년(Jubilee) 사상을 단순히 고대의 죽은 법조문으로 남겨두지 않고, 현대 사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기본소득' 논의와 연결시킨다. 토마스 페인의 자연법 사상과 레위기의 토지법을 연결하여, 천연자원(토지, 환경 등)은 만인의 공유재이므로 그 수익을 모든 국민에게 배당하는 것이 성경적 정의에 부합함을 논증하는 과정은 매우 탁월하다
3. 한국 사회를 향한 예언자적 제언
저자는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인해 청년 실업과 빈곤이 구조화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아모스와 미가 선지자의 눈으로 바라본다. 대기업 중심의 성장 지상주의, 부동산 불패 신화, 그리고 이를 방관하거나 조장하는 종교 권력에 대한 비판은 2,700년 전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자들의 외침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다. 저자는 국가가 기업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사회적 국가'가 되어야 함을 헌법 정신과 성경적 가치를 통해 역설한다
4. 자비가 곧 경쟁력이다
『자비 경제학』은 "경제는 원래 비정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깬다. 애덤 스미스가 말했듯, 건강한 경제는 인간에 대한 '공감' 위에서만 가능하다. 서로를 물어뜯는 경쟁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탱해주는 자비와 연대가 결국에는 공동체 전체를 살리는 길임을 이 책은 웅변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더욱 심화된 불평등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에게 이 책은 '오래된 미래'인 성경의 지혜를 통해 공평과 정의가 흐르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이정표를 제시한다. 경제학도, 신학생, 목회자뿐만 아니라, '돈'이 주인이 아닌 '사람'이 주인인 세상을 꿈꾸는 모든 시민에게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