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 퇴계를 만나다』: 한국적 기독교 영성의 뿌리를 찾는 동서양의 대화
1. 왜 칼뱅과 퇴계인가? 한국적 신학의 모색
이 책은 16세기 서구 종교개혁의 거장 장 칼뱅(Jean Calvin)과 조선 성리학의 완성자 퇴계 이황(Toegye Yi Hwang)이라는 두 사상가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저자 김광묵은 한국 교회가 서구 신학을 수용했으나, 한국인의 심성 기저에는 유교적 영성, 특히 퇴계의 성리학적 가치관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한국 기독교인은 '한국인인 동시에 그리스도인(Simul Christianus et Coreanus)'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지닙니다
이 책은 칼뱅의 '경건(Pietas)'과 퇴계의 '경(敬, Gyeong)'이라는 두 가지 핵심 키워드(근본 메타포)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사상이 어떻게 '참된 인간됨'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지를 탐구합니다. 이는 단순한 비교 연구를 넘어,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한국적 영성 신학'의 정립을 위한 시도입니다
2. 장 칼뱅의 경건 신학: 하나님 앞에서의 실존적 결단
칼뱅 신학의 핵심은 단순히 교리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다루는 데 있습니다. 저자는 칼뱅의 신학을 지탱하는 세 가지 기둥으로 하나님, 인간, 그리고 경건을 제시합니다
2.1. 칼뱅의 하나님: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
칼뱅에게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Total Other)이자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피조 세계와 인간의 역사 속에 친히 들어오셔서 관계를 맺으시는 내재적인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초월적 주재자: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적인 본질로서, 유한한 인간은 결코 그분의 본질(God in Himself)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 이는 인간에게 겸손과 경외심을 요구합니다. 내재적 구원자: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칼뱅은 하나님을 엄위하신 주님(Dominus)인 동시에 자애로운 아버지(Pater)로 묘사합니다
.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섭리를 통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God for us)'입니다.
2.2. 칼뱅의 인간: 타락했으나 회복을 갈망하는 존재
칼뱅의 인간론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본질적 가치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라는 실존적 현실 사이의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본질적 인간: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실존적 인간: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의 지성과 의지는 부패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 회복되는 인간: 그리스도의 대속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인간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자 성화의 과정입니다.
2.3. 칼뱅의 경건(Pietas): 두려움과 사랑의 결합
칼뱅 신학의 정점은 '경건'입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를 통해 신학적 지식이 아닌 '경건'을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경건의 정의: 칼뱅에게 경건이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Fear)과 사랑(Love)이 결합된 태도"입니다
. 이는 단순히 공포에 떠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녀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실천적 영성: 경건은 내면적 감정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배, 기도, 그리고 이웃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칼뱅에게 있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경건한 삶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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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퇴계 이황의 경(敬) 철학: 하늘 이치를 따르는 인간의 길
조선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은 혼란한 사회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경(敬)'에서 찾았습니다. 그의 철학은 하늘(天), 인간(人), 그리고 경(敬)의 구조로 설명됩니다
3.1. 퇴계의 하늘: 의리천이자 주재천
유학에서 하늘(天)은 만물의 근원이자 도덕적 원리입니다. 퇴계는 주자의 리(理)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독창적인 해석을 더했습니다.
의리천(義理天): 하늘은 인간에게 도덕적 본성을 부여하는 궁극적인 이법(理)입니다
. 주재천(主宰天)과 인격성: 퇴계는 하늘을 단순한 자연 법칙을 넘어, 인간의 삶을 감시하고 도덕적 실천을 요구하는 주재자적 성격을 지닌 존재로 인식했습니다. 그는 '상제(上帝)'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하늘을 마치 인격적인 대상처럼 섬기는 '대월상제(對越上帝)'의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 이는 퇴계 철학이 종교적 심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3.2. 퇴계의 인간: 천명을 받은 존귀한 존재
퇴계에게 인간은 '천명(天命)'을 받은 존재입니다
성선설과 인욕: 인간의 본성은 하늘의 이치(天理)를 부여받아 본래 선합니다(사단, 四端). 그러나 육체를 가진 인간은 기질의 영향으로 인해 사사로운 욕심(인욕, 人欲)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칠정, 七情).
성인(聖人) 됨의 목표: 인간의 삶의 목표는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여(존천리거인욕), 하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 즉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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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퇴계의 경(敬): 마음의 주재자이자 수양의 요체
이러한 성인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이자 마음가짐이 바로 '경(敬)'입니다. 퇴계는 경을 "성학(聖學)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주일무적(主一無適):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잡념이 없게 하는 것.
정제엄숙(整齊嚴肅):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
상성성법(常惺惺法): 항상 깨어 있는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것
. 지행호진(知行互進): 퇴계의 경은 앎(궁리)과 실천(거경)이 서로를 이끌어주는 구조입니다. 경은 단순한 명상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하늘의 이치를 실천하는 '동적인 영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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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칼뱅과 퇴계의 위대한 대화: 경건과 경의 만남
저자는 서로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두 사상가를 '철저한 인간화(Radical Humanization)'라는 공통의 주제로 초대하여 대화를 시도합니다.
4.1. 근본 메타포: 경건(Pietas)과 경(Gyeong)
두 사상 모두 인간의 '실존적 불안'과 '자기 초월'을 다룹니다.
내재적 초월 의식: 칼뱅의 경건은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사랑이며, 퇴계의 경은 내재된 하늘 이치(천명)에 대한 자각과 외경심입니다
. 자기 부정과 갱신: 두 사상 모두 현재의 타락한(또는 인욕에 물든) 자아를 부정하고, 더 높은 가치(하나님의 형상, 성인)를 향해 나아가는 치열한 자기 갱신을 요구합니다.
4.2. 인간성 패러다임: 그리스도와 성인
두 사상이 지향하는 인간상의 정점은 어디일까요?
그리스도의 인간성: 칼뱅에게 참된 인간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회복한 모델이며, 신자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성화(Sanctification)되어 갑니다
. 성인(Sage): 퇴계에게 참된 인간성은 요순과 공맹으로 대표되는 성인입니다. 성인은 천명을 완벽하게 실현한 존재이며, 누구나 수양을 통해 도달해야 할 목표입니다
. 공명(Resonance): 비록 기독교는 은총에 의한 구원을, 유교는 자력에 의한 수양을 강조하지만, 양자 모두 '지행합일(知行合一)'과 '사랑(Agape/仁)의 실천'을 통해 완성된 인간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깊이 공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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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형이상학적 대화: 하나님과 하늘
인격성: 칼뱅의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말씀하시고 개입하시는 주재자입니다. 퇴계의 하늘(리)은 원칙적으로는 이법적 존재이지만, 퇴계는 이를 '상제'로 표현하며 인간의 도덕적 삶을 감시하고 명령하는 '인격적 주재성'을 부여합니다
. 내재와 초월: 두 사상 모두 절대자의 초월성(인간과 질적으로 다름)과 내재성(인간 안에 거함/성령, 성품)을 동시에 긍정하며, 이를 통해 인간 삶의 거룩성을 확보하려 합니다.
5. 한국적 영성 신학을 위하여
저자는 칼뱅과 퇴계의 만남이 단순히 과거의 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영성을 재정립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결론짓습니다.
통전적 영성: 한국 기독교는 서구의 '신-역사적 비전'과 동양의 '인간-우주적 비전'이 만나는 지점에 있습니다. 칼뱅의 경건이 강조하는 하나님 사랑과 퇴계의 경이 강조하는 인격 수양 및 우주적 조화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보완적입니다
. 공동체와 생태 영성: 퇴계의 '만물일체' 사상은 칼뱅의 '청지기' 사상과 만나 현대 사회의 위기인 개인주의와 생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인간-우주적' 영성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 한국인의 정체성: 한국 기독교인은 유교적 심성(선비 정신)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퇴계의 '경' 사상을 통해 칼뱅의 '경건'을 재해석할 때, 비로소 한국인의 몸에 맞는 진정한 '선비적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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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국 신학의 새로운 지평, 칼뱅의 '경건'과 퇴계의 '경'이 만나다
1. 16세기, 동서양 영성의 거장들이 마주하다
한국 교회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서구 신학의 무비판적 수용과 한국 전통문화와의 단절이라는 과제가 놓여 있다. 저자 김광묵의 『장 칼뱅, 퇴계를 만나다』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16세기라는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서로 다른 공간에서 활동했던 종교개혁자 칼뱅과 성리학자 퇴계를 '영성'이라는 가교를 통해 만나게 한다. 이 책은 단순한 비교종교학적 연구를 넘어, 한국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흐르는 유교적 심성과 기독교적 신앙의 통합을 시도하는 역작이다.
2. '경건'과 '경': 다름 속에서 발견한 공명
이 책의 가장 큰 탁월함은 '경건(Pietas)'과 '경(敬)'을 근본 메타포(Root Metaphor)로 설정한 데 있다. 저자는 칼뱅의 경건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의 결합"으로, 퇴계의 경을 "천명에 대한 자각과 외경"으로 정의하며 두 개념의 구조적 유사성을 파헤친다. 칼뱅이 부패한 인간 본성을 직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통한 '성화'를 강조했다면, 퇴계는 인간 욕망(인욕)의 위험성을 경계하며 치열한 수양(거경궁리)을 통해 '성인'이 되기를 갈망했다. 저자는 이 두 흐름이 '철저한 인간화'와 '자기 초월'이라는 지점에서 놀랍게 공명하고 있음을 밝혀낸다. 즉, 두 사상가 모두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궁극적 실재(하나님/하늘) 앞에서의 단독자로서 참된 자아를 회복하려 했다는 것이다.
3. 한국적 신학을 위한 창조적 제안
저자는 퇴계의 '상제(上帝)' 개념과 리(理)의 능동성에 주목하며, 유교의 하늘이 단순히 차가운 이법이 아니라 인격적 주재성을 띤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는 기독교의 인격적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이 된다. 또한 퇴계가 추구한 '지행호진(知行互進, 앎과 실천이 서로 나아감)'의 삶은 칼뱅이 강조한 '믿음과 행위의 일치'와 맞닿아 있다. 이 책은 한국 기독교가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성속 분리)를 넘어, 유교의 통합적 세계관(천인합일, 만물일체)을 수용함으로써 '신-인간-우주'를 아우르는 통전적 영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는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와 생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신학적 자원이 될 것이다.
4. 선비적 그리스도인을 꿈꾸며
『장 칼뱅, 퇴계를 만나다』는 신학과 유학이라는 거대한 두 산맥을 가로지르는 험난한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물론 기독교의 '초월적 은총'과 유교의 '내재적 수양' 사이에는 여전히 건너기 힘든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 차이를 억지로 봉합하려 하기보다, '한국인의 마음'이라는 실존적 토양 위에서 두 영성이 어떻게 융합되어 왔는지를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 이 책은 한국의 목회자와 신학도,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독서라 할 만하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칼뱅의 뜨거운 심장을 가진 동시에 퇴계의 고요한 경건함을 지닌, 진정한 '선비적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