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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정치』(배덕만, 조석민, 김근주, 김동춘) 리뷰/요약

 


『복음과 정치』: 한국 교회의 정치 참여와 공적 신앙에 대한 신학적 모색

1. 정치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이 책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2016년 3월 "정치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신학캠프의 결과물이다. 김근주, 조석민, 배덕만, 김동춘 네 명의 신학자는 각각 구약, 신약, 교회사,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왜곡된 정치관을 비판하고, 성경적이고 건강한 정치 참여의 길을 모색한다. 핵심 주제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는 말씀에서 '생활하라'는 단어인 '폴리튜오(politeuw)'가 '시민 노릇을 하다'라는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2. 구약, 그 정치적인 말씀 (김근주)

2.1. 복음의 정치적 본질과 하나님 나라

김근주 교수는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을 개인의 내면적 죄 사함으로만 축소하여 이해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톰 라이트의 견해를 인용하며, 복음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왕이 되셨나"를 보여주는 책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나라(Kingdom)'와 '통치'의 개념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마태복음 2장의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던 사건은 예수의 탄생이 단순한 종교적 사건이 아니라, 기존 권력 구조를 위협하는 지극히 '정치적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수는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셨고, 십자가 명패에도 그 죄목이 '유대인의 왕'이었다. 이는 복음이 세상의 통치 권력과 긴장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2.2. 창조와 통치, 그리고 정의와 공의

구약의 창조 신앙은 단순히 세상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통치권'의 선언이다. 이사야 40장과 52장의 '아름다운 소식(복음)'은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선언과 직결된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는 '정의(미슈파트)'와 '공의(체다카)'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셨으며(창 18:19), 이는 다윗 왕조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되는 삶의 기준이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도덕률이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이다. 따라서 구약 성경을 개인의 윤리나 내면의 평안을 위한 책으로만 읽는 것은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2.3. 개인과 나라의 분리 극복

한국 교회는 구약을 '시민법', '도덕법', '제의법'으로 구분하고 시민법 등을 폐지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성경의 말씀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처럼 체제에 순응하며 악을 행하는 수동적인 인간상을 낳을 수 있다. 예레미야 29장에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고 한 명령은, 그 땅에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라는 정치적 명령이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마 28:18-20) 또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

3.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 (조석민)

3.1. 정치의 정의와 교회의 역할

조석민 교수는 정치를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 또는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일"로 정의하며, 인간의 삶에서 정치와 무관한 영역은 거의 없음을 강조한다. 출산, 대중교통, 영화 등 일상의 모든 영역이 정치적 결정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방치하는 것이며, 이웃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구원은 영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실존 전체의 회복이기에, 교회의 선교 과제에는 정치적 역할도 포함된다.

3.2. 신약성서의 정치 관련 본문 재해석

한국 교회에서 정교분리나 정치 무관심의 근거로 오용되어 온 본문들을 재해석한다.

  • 마가복음 12:13-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이 말씀은 정치와 종교의 영역을 분리하라는 원칙이 아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가 신이 아니며, 하나님만이 참된 주권자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는 제한적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통제권을 전제한 답변이다.

  • 로마서 13:1-7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바울은 국가 권력 자체를 신성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로서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다. 국가의 임무는 '선한 일(정의)'을 장려하고 '악한 일'을 징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복종은 맹목적 굴종이 아니라, '양심을 위한 자발적 복종'이어야 하며, 이는 국가가 정당한 기능을 수행할 때 유효하다.

  • 베드로전서 2:13-17: 베드로는 황제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인간임을 암시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자유인으로서 악을 가리는 데 자유를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과 같이 행동할 것을 권면한다.

3.3. 실천적 제안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첫째, 국가 권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이 신적 존재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정당한 권력에는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되, 불의한 권력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는 '시민 불복종'으로 저항해야 한다. 셋째, 교회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통해 사회 정의를 촉구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실천은 투표 참여를 통해 사회 정의를 구현할 일꾼을 뽑는 것이다.

4. 정교분리의 복잡한 역사 (배덕만)

4.1. 정교분리 헌법의 기원과 한국적 수용

배덕만 교수는 해방 이후 한국 보수 개신교가 '정교분리'를 시대적 상황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해 온 역사를 추적한다. 미국 헌법 수정 제1조에서 유래한 정교분리는 본래 국가가 특정 종교를 국교화하거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국 제헌헌법 역시 이를 수용했으나, 현실 역사에서는 정교유착과 정교갈등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4.2. 시기별 한국 교회의 태도 변화

  • 1945-1960 (미군정 및 제1공화국): 이 시기 개신교는 '반공'과 '친미'를 고리로 정권과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개신교인들이 미군정 요직을 차지하고 적산 가옥 불하 등 특혜를 입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교회의 정치 참여는 시대적 사명"으로 여겨졌으며, 정교분리 원칙은 사실상 무시되었다.

  • 1960-1987 (군사독재 정권): 4.19 혁명 이후 잠시 반성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5.16 이후 보수 교계는 다시 군사정권과 유착했다. 특히 1969년 3선 개헌을 기점으로 진보와 보수가 갈라졌다. 보수 진영은 독재에 저항하는 진보 진영을 향해서는 "정교분리 원칙을 어겼다"고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은 국가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정권을 축복하고 지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 1987-2012 (민주화 이후): 민주화 이후,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잃어버린 10년)가 들어서자 보수 교계는 태도를 돌변했다. 친북·반미 성향의 정부에 대항하여 '정교분리' 원칙을 버리고 노골적인 정치 세력화(기독당 창당, 뉴라이트 운동)에 나섰다. 반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친정부적 성향을 보이다가, 불교 지원 문제(템플스테이 등)나 이슬람 채권법(스쿠크법) 등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될 때는 '정교분리(종교 편향 금지)'를 내세워 정부를 공격했다.

4.3. 역사적 평가와 과제

한국 보수 교회의 정교분리 주장은 일관된 신학적 원칙이 아니라, 기득권 유지와 이데올로기적 편향(반공, 친미)에 따른 '편의적 도구'였다. 정권과 코드가 맞을 때는 유착하고, 맞지 않거나 이익이 침해될 때는 분리나 저항을 외쳤다. 저자는 냉전 체제와 분단 구조가 이러한 기형적인 행태를 낳았다고 분석하며, 이를 극복하고 '창조적 긴장 관계'로서의 진정한 정교분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5.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기독교정치론 (김동춘)

5.1. 보수 교회의 정치 무관심과 이분법

김동춘 교수는 보수 교회가 정치를 외면해 온 신학적 배경을 분석한다. 그들은 성경을 비정치적으로 읽으려 노력하며, 복음과 정치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한다. 구원은 '영혼 구원'으로, 교회는 '구원 기관'으로만 한정하며 신앙을 사사화(privatization)했다. 이는 정치 혐오증과 정치 허무주의를 낳았지만, 역설적으로 독재 정권에는 순응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5.2. 기독교 정치론의 유형 분석

  • 신정국가적 기독교 정치론 (근본주의): 성경의 문자적 원리를 현대 국가에 직접 적용하려는 시도다. 기독당이나 성시화 운동, 일부 뉴라이트 운동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다원주의 사회의 현실을 무시하고 기독교 패권주의로 흐를 위험이 크다.

  • 하나님 나라 정치론 (개혁적 복음주의): 희년 사상이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정의, 평화)를 사회 변혁의 원리로 삼는다. 김회권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성경적 원리를 공적 영역에 적용하려는 긍정적 시도이나, 구체적인 정책 대안이나 전략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 두 왕국론 (루터파 현실주의):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분하고, 세상 나라는 이성과 법(칼)으로 통치된다고 본다. 이는 교회와 국가의 혼동을 막아주지만, 한국 보수 교회에서는 불의한 권력에 침묵하고 순응하는 논리로 오용되었다.

  • 그리스도 주권론 (칼빈주의/신칼빈주의): 삶의 전 영역이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강조한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이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으로 소개되었으나, 정치 영역보다는 문화나 학문 영역에 국한된 경향이 있었다. 이 이론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

  • 교회론적 정치론 (재세례파/대안주의): 교회 자체가 세상과 구별되는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로서 대안적인 정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짐 월리스나 요더의 사상이 이에 해당한다.

5.3. 공적 증언으로서의 정치

한국 교회는 신정정치적 열광주의를 넘어 '정치적 제자도'를 회복해야 한다. 기독교 정치는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청지기로서 상대적 선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행위다. 교회의 정치적 발언과 실천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공적 증언(Public Witness)'이며, 이는 그 자체로 선교적 행위다. 교회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허상 뒤에 숨지 말고, 정의와 공의를 위해 분명한 신앙 고백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서평] 기독교 신앙과 정치의 건강한 긴장을 위하여

"복음은 정치적이다." 이 명제는 한국의 많은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낯설고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 오랜 세월 한국 교회 강단에서 정치는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되거나,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편향된 방식으로만 소비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펴낸 『복음과 정치』는 성경과 역사, 그리고 신학적 분석을 통해 복음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정치가 곧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실현임을 강력하게 논증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성경 해석의 교정'에 있다. 김근주 교수는 구약의 예언서와 율법이 말하는 '정의와 공의'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사법적·구조적 시스템임을 밝힌다. 조석민 교수 역시 로마서 13장과 같은 본문이 독재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강요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의 본래 목적(선행 장려, 악행 징벌)을 상기시키는 말씀임을 명쾌하게 해설한다. 이러한 성경적 재해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치 참여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시민적 의무임을 깨닫게 한다.

배덕만 교수의 역사적 분석은 한국 교회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정교분리'라는 원칙이 한국 현대사에서 얼마나 기만적으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통찰은 뼈아프다. 보수 교회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때는 정권과 유착하고,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되거나 진보 진영을 공격할 때만 정교분리를 내세웠다는 지적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사회적 신뢰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짚어낸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행보를 성찰하게 하는 거울이 된다.

김동춘 교수의 신학적 유형 분석은 기독교 정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그는 무비판적인 신정국가론의 위험성을 경계하면서,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공공성을 확보하고 '공적 증언'으로서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을지 모색한다. 특히 정치를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책임적 행위'로 규정하며, '정치적 제자도'를 요청하는 결론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이 책은 정치의 계절마다 혼란을 겪는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훌륭한 가이드북이다. 정치가 단순히 권력을 잡는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웃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사회 구조를 개선하는 '사랑의 기술'임을 일깨워준다. 또한, 투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곧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와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각 챕터가 신학 캠프의 강의안을 바탕으로 하여 다소 압축적이라는 점이다. 더 구체적인 현실 정치의 이슈들(예: 경제 불평등, 통일 문제, 생태 위기 등)에 대해 각 신학적 입장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각론이 더 풍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총론'으로서 이 책은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이원론을 깨트리고, 복음의 총체성을 회복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혐오와 배제, 진영 논리로 얼룩져 있다. 이때 교회가 세상의 방식과 다른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양극화의 선봉에 서 있는 현실은 안타깝다. 『복음과 정치』는 교회가 특정 정파의 하수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라는 거룩한 기준을 가지고 세상 권력을 감시하며 약자를 대변하는 예언자적 공동체로 거듭날 것을 촉구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을 등지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참된 시민으로 살아가라는 엄중한 명령임을 이 책은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