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이것저것의 물리학』: 세상의 모든 호기심을 과학으로 연결하다
1. 물리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의 경이로움
김범준 교수의 신작 《김범준의 이것저것의 물리학》은 제목 그대로 우리 주변의 '이것저것', 즉 잡다해 보이는 일상의 현상부터 우주의 신비까지 물리학의 언어로 풀어낸 책이다. 저자는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이자 통계물리학자로서, 복잡해 보이는 세상을 꿰뚫는 단순한 원리를 탐구한다. 이 책은 단순히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사고방식을 강조한다.
2. 6가지 테마로 읽는 물리학과 세상
1부: 물리학 뜯어보기 - 일상과 우주의 법칙
존재의 이유와 물질-반물질의 비대칭성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물리학적으로 이 질문은 "왜 우주는 텅 비어 있지 않고 물질로 채워져 있는가?"로 치환된다. 빅뱅 초기, 물질과 반물질은 쌍으로 생성되었다가 쌍소멸하여 에너지로 변했다. 완벽한 대칭이 존재했다면 우주엔 빛(에너지)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한다. 이는 물질과 반물질의 대칭성이 아주 미세하게 깨졌기 때문이다. 최근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가 다르게 행동한다는 'T2K' 실험 결과는 이 비대칭성의 단서를 제공하며,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물리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미래의 결정론과 자유의지 뉴턴 역학에 따르면 우주의 미래는 초기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환상일까? 카오스 이론은 초기 조건의 미세한 차이가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음을 보여주지만, 이는 '예측 불가능성'일 뿐 '비결정론'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물리학자 니콜라스 기진은 무한대의 정밀도를 가진 정보는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미래는 본질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자유의지는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우주의 내재적 속성일지 모른다.
바이칼 젠: 자연이 빚은 조각품 러시아 바이칼 호수에는 얼음 기둥 위에 돌이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는 '바이칼 젠'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바람에 의한 침식이 아니라 태양 복사열에 의한 승화 작용 때문이다. 돌은 양산처럼 햇빛을 가려 그 아래 얼음의 승화를 늦춘다. 동시에 돌 자체가 데워지며 내뿜는 복사열로 인해 돌 바로 밑 얼음은 오목하게 파인다. 결국 바이칼 젠은 '양산을 쓴 얼음 기둥'인 셈이다.
마찰력의 비밀: 빗길과 침 묻힌 손가락 비가 오면 길은 미끄러워지지만(마찰력 감소), 책장을 넘길 때 침을 묻히면 잘 넘어간다(마찰력 증가). 물이라는 같은 물질이 왜 반대 효과를 낼까? 거친 표면(도로) 사이에 낀 물은 윤활유 역할을 하여 마찰을 줄인다. 반면, 매끄러운 표면(종이와 손가락) 사이에 적당한 수분이 있으면 물의 표면장력과 수소결합이 작용하여 서로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마찰력이 커진다.
2부: 생물학 읽어보기 - 진화와 생존의 수학
성은 왜 둘인가? 성(Sex)이 셋 이상이라면 어떨까? 수학적 모델링에 따르면, 세 개의 성(A, B, C)이 교배하여 다른 성의 자손을 낳는 시스템은 개체 수의 불안정성을 초래하여 멸종하기 쉽다. 반면 두 개의 성은 1:1 성비를 유지하며 안정적인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 인류가 XY 성결정 시스템을 따르고 YY와 같은 제3의 성이 없는 이유는 종의 존속을 위한 진화적 전략이다.
피셔의 원리와 성비 1:1 바다코끼리처럼 소수의 수컷이 다수의 암컷을 독점하는 종이라도 태어나는 새끼의 성비는 1:1에 수렴한다. 이는 '피셔의 원리'로 설명된다. 만약 암컷이 많아지면 수컷을 낳는 것이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유리해져 수컷이 늘어나고, 반대의 경우 암컷이 늘어난다. 결국 게임이론의 내쉬 균형처럼 성비는 1:1로 맞춰진다.
황제펭귄의 허들링과 육각격자 혹한을 견디는 황제펭귄들은 서로 몸을 밀착하는 '허들링'을 한다. 이때 가장 효율적인 밀집 형태는 육각격자 구조다. 펭귄들은 자신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의 안쪽으로 파고들려 하고, 바람을 맞는 외곽의 펭귄은 순차적으로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전체 무리는 타원형 육각격자 형태를 띠며 이동하고, 모든 개체가 공평하게 추위를 분담하며 생존한다.
3부: 뇌과학과 인공지능 훑어보기 - 연결과 지능
시간의 상대성: 뇌 속의 시계 즐거운 시간은 빨리 가고 지루한 시간은 늦게 간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도파민 분비가 늘어나면 뇌 내부의 시계가 빨리 간다(클럭 속도 증가). 뇌가 1초에 20번 째깍거리면, 외부의 1초를 2초처럼(느리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정보처리가 빨라져 외부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끼거나 혹은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새로운 경험과 즐거움은 뇌의 시간 인식을 변화시켜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자기 목소리의 낯설음 녹음된 내 목소리가 낯선 이유는 '골전도' 때문이다. 내가 말할 때 나는 소리는 공기를 통해 귀로 들어오는 소리와 머리뼈를 울려 전달되는 소리가 합쳐진 것이다. 머리뼈는 낮은 주파수의 소리를 잘 전달(로-패스 필터)하므로, 내가 듣는 내 목소리는 남이 듣는 것보다 더 저음이고 울림이 있다. 골전도 헤드폰을 쓰면 자기 목소리 인식률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는 이를 뒷받침한다.
인공지능과 뇌의 학습 현대 인공지능(딥러닝)은 뇌의 신경망 구조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학습 방식은 다르다. 인공지능은 '역전파(Backpropagation)'라는 알고리즘을 통해 출력 오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중치를 수정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뇌에서는 역전파와 같은 메커니즘이 발견되지 않았다. 최근 뇌과학과 물리학은 뇌의 실제 학습 방식(예측 코딩 등)을 모사하여 더 효율적인 차세대 인공지능을 개발하려 시도하고 있다.
ChatGPT와 창의성 ChatGPT와 같은 거대언어모델(LLM)은 확률적으로 가장 적절한 다음 단어를 예측하여 문장을 생성한다. 이는 인간의 창의성과 어떻게 다를까? 저자는 창의성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지식의 새로운 연결'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인공지능의 결과물도 창의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결과로서의 창의성은 보여주지만, 과정으로서의 사고는 부재하다.
4부: 통계와 통계물리 톺아보기 - 복잡계의 질서
생일 문제와 우연의 필연성 축구 경기장에 모인 관중 23명 중 생일이 같은 쌍이 있을 확률은 50%가 넘는다. 60명 정도가 모이면 그 확률은 99%에 육박한다. 이는 직관에 반하지만 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선거 개표에서 득표수가 정확히 같은 후보가 나오는 현상 등을 음모론으로 몰아가기 전에, 통계적으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우연의 필연'임을 이해해야 한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인하지 말라는 속담이다. 반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는 인과관계를 강조한다. 통계물리학은 데이터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하지만, 그것이 곧 인과관계를 의미하지 않음을 늘 경계한다. 초콜릿 소비량과 노벨상 수상자 수의 높은 상관관계는 '경제력'이라는 제3의 요인 때문이지, 초콜릿이 노벨상의 원인은 아니다.
동기화: 반딧불이와 양떼 수천 마리의 반딧불이가 동시에 깜빡이는 현상은 '구라모토 모형'으로 설명된다. 각 개체가 고유한 진동수를 가지더라도 상호작용이 강하면 전체가 동기화(Synchronization)된다. 양떼의 움직임도 흥미롭다.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다가(무질서) 갑자기 줄지어 이동(질서/동기화)한다. 연구에 따르면 양 떼에는 고정된 리더가 없으며, 정보를 가진 개체가 일시적으로 리더가 되어 효율적으로 무리를 이끈다. 이는 '집단지성'의 훌륭한 예시다.
5부: 이것저것 들여다보기 - 과학과 문화의 만남
테드 창의 소설과 과학적 상상력 SF 작가 테드 창은 과학 이론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멋지게 확장한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변분 원리(최소 작용의 원리)를 통해 미래를 기억하는 외계인의 언어를 다루며, <일흔 두 글자>는 전성설과 열역학을 결합한다. 저자는 과학이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상상력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테넷과 엔트로피 영화 <테넷>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인버전 현상을 다룬다. 물리학의 기본 법칙은 시간 대칭성이 있어 시간이 거꾸로 흘러도 성립하지만, 거시 세계에서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열역학 제2법칙). 영화는 이러한 물리적 난제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며 시간과 엔트로피의 관계를 탐구하게 한다.
6부: 과학과 사회 생각하기 - 태도와 미래
과학은 신화가 아니라 과정이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은 절대적 진리나 신화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과학적 지식은 언제든 수정될 수 있는 잠정적인 결론이며, 끊임없는 의심과 검증, 그리고 과학자 사회의 신뢰를 통해 발전한다. 과학의 가치는 확실성이 아니라,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개방성에 있다.
세 번째 기준틀과 공감 상대성 이론은 관찰자의 기준틀에 따라 시공간이 다르게 보임을 알려준다. 사회적 갈등도 각자의 기준틀에 갇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저자는 나와 너의 기준틀이 아닌 '제3의 기준틀'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이는 객관성을 확보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과학적 태도이자 사회적 지혜이다.
[서평] 과학이라는 렌즈로 본 세상의 따뜻한 질서
일상 속에 숨겨진 우주를 발견하다
김범준 교수의 《김범준의 이것저것의 물리학》은 제목처럼 물리학이라는 딱딱한 학문을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 놓은 친절한 가이드북이다. 보통의 물리학 교양서가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 같은 거대 담론에 치중하거나 난해한 수식으로 독자를 압도한다면, 이 책은 빗길의 마찰력, 펭귄의 포옹, 투표의 통계학, 심지어는 영화 속 사랑 이야기까지 우리의 피부에 와닿는 소재들을 다룬다.
저자의 시선은 따뜻하고 섬세하다. 그는 차가운 방정식 속에 갇힌 자연이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세상 속에서 작동하는 원리를 끄집어낸다. 예를 들어, 황제펭귄이 혹한을 견디기 위해 육각격자 모양으로 뭉치는 현상을 설명하며, 그는 단순히 열역학적 효율성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체온을 나누어주는 생명체의 '협력'과 '이기심'이 어떻게 수학적으로 최적화된 아름다운 구조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이는 물리학이 단순히 자연을 분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틀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의 지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학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유연함에 있다. 저자는 물리학자이지만 생물학의 진화론, 뇌과학의 인지 작용, 사회학의 집단 현상, 그리고 예술과 문학까지 거침없이 탐험한다. 특히 '통계물리학'이라는 저자의 전공은 이러한 융합의 강력한 무기가 된다. 많은 수의 구성요소가 상호작용할 때 나타나는 거시적인 패턴을 연구하는 통계물리학은, 신경세포가 모여 의식을 만드는 뇌의 신비나 개인이 모여 사회적 흐름을 만드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탁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도마뱀의 비늘 무늬에서 자석의 스핀 모델(이징 모형)을 발견하고, 양떼의 움직임에서 민주적 의사결정과 계층적 구조의 조화를 읽어내는 대목은 지적 쾌감을 선사한다. 이는 학문 간의 벽이 인간이 편의상 만든 허상일 뿐, 자연에는 경계가 없음을 웅변한다.
과학적 태도: 확실성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과학
책의 후반부인 '과학과 사회 생각하기' 챕터는 이 책이 단순한 지식 전달서를 넘어섬을 보여준다. 저자는 과학을 '절대적 진리'나 '신화'로 받드는 태도를 경계한다. 대신 과학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데이터를 통해 검증하며, 잠정적인 결론을 수정해 나가는 '과정'임을 역설한다. 이러한 '과학적 태도'는 분열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진영 논리(기준틀)에 갇혀 타인을 배척하는 사회에서, 상대성 이론이 알려주는 '기준틀의 상대성'을 인식하고 '제3의 기준틀'을 모색하자는 제안은 울림이 있다. 또한, 100%의 확신보다는 데이터에 기반한 합리적 의심과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임을 일깨워준다.
결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과학적 사유
《김범준의 이것저것의 물리학》은 과학이 실험실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무심코 지나쳤던 빗방울, 밤하늘의 별, 뉴스 속 통계 수치,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저자는 복잡한 수식 없이도 물리학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얼마나 투명하고 아름답게 볼 수 있는지 증명해 냈다. 세상의 작동 원리가 궁금한 호기심 많은 독자, 과학적 사고방식을 통해 삶의 통찰을 얻고자 하는 이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이 차갑지 않고 인간적일 수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모든 이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우리는 모두 별의 후예이며,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 거대한 우주적 네트워크의 일부임을, 이 책은 물리학의 언어로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