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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라는 세계』(이종태) 리뷰/요약

 


『경이라는 세계』: C.S. 루이스와 함께 찾는 잃어버린 의미와 설렘

1. 신나는 세계를 잃어버린 현대인

우리는 살면서 '신나는' 경험을 원합니다. 신나는 세계란 단순히 재미있는 곳이 아니라, '의미'가 가득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의미를 상실한 채 우울과 무기력(멜랑콜리)을 근본 기분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이러한 현대의 특징을 '세계의 탈주술화(The Disenchantment of the World)'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는 세상이 더 이상 신비한 힘이나 의미로 가득 찬 곳이 아니라, 인간의 계산과 기술로 파악하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책은 근대 이후 우리가 잃어버린 '경이(Wonder)'를 회복하고자 합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어른이 되어버렸거나, 세상을 단순히 과학적 현상으로만 보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저자 이종태는 C.S. 루이스의 사상과 『나니아 연대기』를 길잡이 삼아, 탈주술화된 무의미한 우주에서 다시금 '경이'를 발견하고 세계를 '재주술화(Re-enchantment)'하는 여정으로 독자를 초대합니다.

2. 세계의 탈주술화와 의미의 위기

탈주술화란 무엇인가?

'탈주술화'는 인류가 주술적 사고에서 벗어나 합리화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고대인들에게 나무나 별은 신(神)이거나 정령이 깃든 존재였지만, 현대인에게는 그저 목재이거나 가스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시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있었습니다. 창조주가 자연과 분리됨으로써, 자연은 숭배의 대상에서 인간의 관리와 연구의 대상(피조물)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근대 과학과 계몽주의는 이 과정을 가속화하여, 역사와 자연에서 신의 자리를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무의미의 공포

탈주술화는 인류에게 지식과 기술적 풍요를 주었지만, 동시에 '의미의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전근대인들이 살던 코스모스(Cosmos)는 의미와 목적이 내재된 집과 같았지만, 현대인이 사는 유니버스(Universe)는 텅 빈 공간(The Space)입니다. 영화 <그래비티>의 주인공처럼 현대인은 의미 없는 공간을 부유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베버는 인간이 주체적으로 의미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지만, C.S. 루이스와 찰스 테일러 같은 사상가들은 "인간은 의미 있는 세계 안에서만 비로소 의미 있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3. C.S. 루이스와 나니아: 신들로 가득한 세계의 회복

텅 빈 우주 vs. 충만한 우주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현대인이 잃어버린 '충만한 세계'를 그려냅니다. 나니아는 "모든 나무는 님프이고, 모든 행성은 신"인 세계, 즉 의미와 생명이 가득한 곳입니다. 루이스가 이 이야기를 쓴 이유는 우리가 다시 고대의 미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가스 덩어리' 이상의 무엇으로 보는 '새로운 눈'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동경(Sehnsucht)과 기쁨(Joy)

나니아 같은 페어리테일(Fairy Tale)은 독자에게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루이스는 이 특별한 갈망을 '기쁨(Joy)'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자 그 자체로 다른 어떤 만족보다 더 갈망하게 되는 신비한 고통입니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그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영적 갈망을 지닌 존재입니다. 나니아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근원적 동경이 투영된 공간입니다.

4. 과학과 마법: 지배욕이라는 쌍둥이

근대 과학의 숨겨진 기원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루이스는 근대 과학과 마법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쌍둥이'라고 보았습니다. 중세의 마법이 동화적이었다면, 르네상스 시기의 마법은 자연을 조작하고 지배하려는 기술적 욕망, 즉 '리비도 도미난디(Libido Dominandi, 지배욕)'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하얀 마녀와 과학주의

『나니아 연대기』에서 나니아를 영원한 겨울로 만든 하얀 마녀의 마법은 자연을 통제하고 생명을 박제하려는 과학주의적 태도를 상징합니다. 과학주의는 세상을 '눈(관조)'으로 보지 않고 '손(장악)'으로 다루려 합니다. 손이 닿는 순간 생명은 사물(Object)로 변하고, 세상은 박물관의 화석처럼 굳어버립니다. 루이스는 진정한 지혜는 실재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실재에 순응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5. 경이와 호기심: 보는 눈의 차이

무지개를 푼다는 것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는 "차가운 철학(과학)이 무지개를 풀어헤쳐 그 신비를 없애버렸다"고 한탄했습니다 . 이에 대해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적 지식이 오히려 더 큰 경이를 준다고 반박했지만, 키츠가 말한 경이는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초월의 암시'를 느끼는 체험이었습니다.

큐리오시타스(Curiositas) vs. 스투디오시타스(Studiositas)

중세 신학은 지적 탐구심을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1. 호기심(Curiositas): 모르는 것을 정복하고 소유하려는 욕망(눈의 욕망). 대상을 사랑하지 않고 지배하려 합니다.

  2. 면학심(Studiositas): 대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깊이 알고 싶어 하는 마음. 이미 아는 것을 더 깊이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현대 문명은 '호기심'에 사로잡혀 세상을 두리번거리지만, 진정한 철학은 '경이(Wonder)', 즉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경탄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6. 표징으로서의 세계와 성사적 세계관

플라톤과 성육신

루이스는 이 세상이 진짜 실재(Real Reality)의 그림자라고 본 플라톤의 사상에 동의합니다. 기독교의 성육신(Incarnation) 사상은 여기에 더해, 신의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들어왔음을 선포합니다. 이는 곧 이 세상 모든 물질과 자연이 단순히 물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거룩한 표징(Sacrament)'임을 의미합니다.

말씀 천지

성사적 세계관에서 나뭇잎 하나, 개나리꽃 한 송이는 모두 하나님의 신비를 드러내는 '보이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의미의 소재지이며, 우리는 그 표징들을 통해 초월적 실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7. 태초에 노래가 있었다: 춤추는 신과 인간

아슬란의 노래와 창조

나니아의 창조 장면에서 아슬란은 세상을 기계처럼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불러 창조합니다. 별들과 나무들은 아슬란의 노래에 호응하여 춤추며 생겨납니다. 이는 창조가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이 흘러넘친(Overflow)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장엄한 춤(The Great Dance)

기독교가 말하는 신은 고독한 독재자가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 즉 '장엄한 춤'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신은 인간을 이 기쁨의 춤으로 초대하기 위해 창조했습니다. 나니아에서 구원받은 존재들이 아슬란 주변을 돌며 춤추는 장면은 바로 이 신학적 비전의 정점입니다.

8. 결론: 루시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진정한 삶은 이 세계를 '가스 덩어리'가 아니라 '신의 노래'로, '대상'이 아니라 '춤의 파트너'로 알아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나니아 연대기』의 루시는 아슬란을 가장 자주 알아보는 '반짝이는 눈(Seeing Eye)'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개안(開眼)'입니다. 세상의 모든 떨기나무가 신의 불로 타오르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눈, 호기심으로 대상을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경이로움으로 대상을 바라보며 "반짝반짝 작은 별, 네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구나(How I wonder what you are)"라고 노래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책은 탈주술화된 잿빛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다시금 심장을 뛰게 하는 '경이'라는 세계로의 초대장입니다.




[서평] 차가운 우주에서 심장이 뛰는 세계로의 귀환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네." 워즈워스의 시구처럼, 우리는 무지개를 보며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프리즘을 통과한 빛의 굴절 원리를 떠올리며 무덤덤하게 지나치고 있는가? 이종태의 『경이라는 세계』는 바로 이 지점, 현대인이 잃어버린 '설렘'과 '의미'의 상실을 정면으로 다루며 시작한다.

저자는 막스 베버의 '탈주술화' 개념을 빌려 현대 사회를 진단한다. 과학의 발달로 우리는 우주의 작동 원리를 알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우주가 품고 있던 신비와 의미를 잃어버렸다. 별은 더 이상 신들의 춤이 아니라 불타는 가스 덩어리가 되었고, 인간은 의미 없는 거대한 공간(Space)을 부유하는 고독한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위기' 속에서, 저자는 C.S. 루이스라는 탁월한 안내자를 통해 우리를 다시 '경이(Wonder)'의 세계로 이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동화(Fairy Tale)'를 단순한 도피처가 아닌, 실재를 더 선명하게 보게 하는 안경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과학주의가 축소해버린 현실 너머의 '진짜 현실(Reality)'을 보게 하는 도구다. 저자는 루이스의 입을 빌려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성분)가 곧 별이 무엇인지(본질)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일갈한다. 이는 과학적 환원주의에 갇힌 현대인의 사고에 균열을 내는 통쾌한 지적이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과학과 마법의 공모'를 다룬 6장이다. 우리는 흔히 과학이 마법을 몰아냈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초기 근대 과학과 마법이 '자연을 지배하고 조작하려는 욕망(Libido Dominandi)'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쌍둥이임을 밝힌다. 나니아를 얼어붙게 만든 하얀 마녀의 마법이 곧 현대의 기술 만능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해석은 섬뜩하면서도 깊은 통찰을 준다. 대상을 사랑하여 알고자 하는 '면학심(Studiositas)' 대신, 대상을 장악하기 위해 파헤치는 '호기심(Curiositas)'이 지배하는 세상은 결국 박제된 박물관처럼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경고는 묵직하다.

책은 후반부로 갈수록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해 대안을 제시한다. 세상을 기계가 아닌 '노래'와 '춤'으로 창조된 곳으로 보는 시각은 메마른 현대인의 감수성에 단비를 뿌린다. 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사랑의 범람' 때문이며, 삼위일체의 관계 자체가 '장엄한 춤'이라는 설명은 딱딱한 교리를 넘어선 아름다운 미학적 비전을 보여준다.

『경이라는 세계』는 기독교 서적이지만, 종교를 넘어선 인문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하이데거, 찰스 테일러를 넘나드는 저자의 지적 여정은 탄탄하며, 문체는 강연을 바탕으로 하여 친절하고 부드럽다. 이 책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세상을 다시 경이롭게 바라보라"고 권유한다. 루시가 옷장 문을 열고 나니아를 발견했듯, 우리 눈앞의 평범한 일상을 '경이'라는 렌즈로 다시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무미건조한 팩트의 세계에 지친 독자들, 그리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다시금 "네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구나(How I wonder what you are)"라고 노래하고 싶은 모든 '어른아이'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