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와 방랑 - 기독교 신학의 불교적 상상력』(김승철)
기독교 신학의 새로운 상상력과 불교와의 만남
이 책은 기독교 신학이 서구의 헬레니즘적 사고방식과 근대 이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불교와의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어떻게 자기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저자 김승철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동아시아의 종교적 토양 위에서, 기독교가 타자(불교)를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는 '양경반조(兩鏡返照)'의 시도를 감행한다. 이는 단순한 종교 간의 비교를 넘어,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인 탈구축과 재구축을 지향하는 작업이다. 책은 '무주(無住)'와 '방랑'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고정된 실체로서의 신과 자아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관계와 비움의 영성을 채워 넣는다.
제1장: 무주(無住)와 방랑 - 즉비(卽非)의 논리와 해체의 신학
이 장은 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저자는 스즈키 다이세츠의 선사상을 빌려 '즉비(卽非)의 논리'를 소개한다. 이는 "A는 A이다. 왜냐하면 A는 A가 아니기 때문이다(A即非A)"라는 논리 구조로, 서구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동일률(A=A)과 배중률을 넘어서는 렘마(Lemma)적 사고이다 . 즉비의 논리는 긍정과 부정, 존재와 비존재가 상호 배타적이지 않고 역설적으로 공존하며 서로를 성립시키는 구조를 말한다.
저자는 이 논리를 데리다와 마크 테일러의 '해체주의 신학'과 연결한다. 서구 신학이 '로고스 중심주의'에 기반하여 신, 자아, 역사, 책이라는 고정된 중심을 구축해 왔다면, 불교의 공(空) 사상과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은 이러한 중심을 해체한다 . 여기서 '무주(Non-Abiding)'는 고정된 실체나 교리에 안주하지 않는 태도이며, '방랑(Erring)'은 진리의 고정된 목적지가 사라진 상태에서 끊임없이 길을 떠나는 영적 여정을 의미한다 . 이는 신의 죽음 이후, 인간 중심주의마저 넘어선 포스트모던적 무/신학(a/theology)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제2장: 테오토코스(Theotokos)와 불모(佛母)
이 장에서는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와 불교의 보살 사상을 비교하며 구원론적 의미를 재해석한다.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은 자(Theotokos)'로 고백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자아를 철저히 비우고 신의 뜻을 받아들인 '신앙의 순종(Fiat)' 때문이다 . 이는 불교에서 지혜(반야)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부처를 낳는다는 '불모(佛母)'로서의 문수보살이나,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상통한다 .
저자는 마리아와 보살 모두 '자기를 비움(Kenosis)'으로써 신적 실재나 깨달음을 현현시키는 통로가 된다고 본다 . 특히 '보살로서의 예수'라는 개념을 통해, 예수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철저한 자기 비움과 타자를 위한 대속적 사랑의 실천자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 이는 기독교의 배타성을 극복하고, 신앙이 객관적 대상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무집착'과 '사랑'의 실천임을 보여준다.
제3장: 역사와 절대무
폴 틸리히와 니시타니 케이지의 논의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역사 이해와 불교의 공(空) 사상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다룬다. 틸리히는 역사를 '신국(Kingdom of God)'을 향한 목적론적 과정으로 보며, 불교의 열반을 역사 이탈적이라고 비판했다 . 그러나 저자는 아베 마사오와 니시타니 케이지의 입장을 빌려, 불교의 열반이 단순한 허무나 정지가 아님을 역설한다.
불교에서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이 영원과 맞닿아 있는 '지금 여기'의 절대 현재이다 . 니시타니에게 역사는 '무(無)의 자기 한정'이며, 진정한 역사성은 자아 중심적인 시간관을 벗어나 '공(空)'의 입장에 설 때 회복된다 . 이는 기독교의 종말론이 미래에 도래할 어떤 시점이 아니라, 매 순간 결단을 통해 영원을 사는 실존적 사건으로 재해석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절대무는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성립시키는 근원적 바탕이다.
제4장: 만해의 '님'과 실천적 다원주의
한국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의 사상을 통해 실천적 종교다원주의를 모색한다. 만해에게 깨달음은 개인적 해탈에 머물지 않고, 중생 구제라는 사회적 실천(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그의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은 부처, 조국, 연인 등 다양한 대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포괄적이고 관계적인 상징이다 .
저자는 만해의 '님'이 특정 종교의 배타적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궁극적 실재이자 사랑의 대상임을 강조한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는 만해의 통찰은 신과 인간, 주체와 객체의 상호적 관계를 보여준다 . 이는 폴 니터가 주창한 '구원 중심주의(Soterio-centrism)'와 연결되어, 종교 간 대화가 교리 논쟁을 넘어 고통받는 이웃을 위한 실천적 연대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
제5장: 십우도(十牛圖)와 신학
선불교의 수행 과정을 묘사한 '십우도'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신앙의 성숙 과정을 설명한다. 소(참된 자아 또는 신성)를 찾아 나서는 심우(尋牛)에서 시작하여, 소를 얻고(득우), 소와 자아를 모두 잊는 인우구망(人牛俱忘)을 거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중생을 돕는 입전수수(入廛垂手)에 이르는 과정은 기독교인의 영적 여정과 유사하다 .
특히 8번째 단계인 '인우구망(사람도 소도 모두 잊음)'은 절대무의 체험이자 철저한 자기 부정의 단계이다. 그러나 불교의 깨달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반본환원) 저잣거리에서 중생을 돕는(입전수수) 단계로 완성된다 . 이는 기독교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육신의 역동성과 맞닿아 있다. 저자는 이를 통해 종교다원주의가 하나의 정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방랑'과 '무주'의 과정임을 강조한다.
제6장: 일본에서의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
일본의 독특한 종교적 풍토인 '중층 신앙'과 니시다 철학을 매개로 한 기독교-불교 대화의 역사를 추적한다. 일본 기독교는 서구 신학을 그대로 수용하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와 일본적 토양에 뿌리내리려는 '문화적 기독교'의 흐름이 있다 . 특히 니시다 키타로의 '절대무의 철학'은 야기 세이이치, 타키자와 가츠미 등에게 영향을 주어 '불교적 기독교 신학'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
야기 세이이치는 기독교의 신앙을 '예수라는 역사적 인격'에 한정하지 않고, 인간 존재의 근저에 있는 '원사실(신과 인간의 근원적 관계)'의 자각으로 확장시켰다 . 또한 엔도 슈사쿠의 문학은 서구의 부성적 신을 동양의 모성적 자비로 전환하며 기독교의 토착화를 문학적으로 시도했다 . 저자는 이러한 일본의 시도들이 서구 신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중요한 자산임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성과 사회적 실천이 결여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계한다 .
제7장: 토착화와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그 이후
한국의 대표적 토착화 신학자인 일아 변선환 박사의 신학을 조명한다. 변선환은 서구 중심의 기독교가 동양 종교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던 배타주의를 비판하고, '타종교의 신학'을 주창했다 . 그는 불교와의 만남을 통해 서구 신학적 자아를 해체하고, 한국의 종교적 영성 안에서 기독교를 재해석하고자 했다.
변선환에게 타종교는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신학의 주체였다. 그는 "한국의 종교성이라는 요단강과 한국의 가난이라는 골고다에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 저자는 변선환의 신학이 단순한 토착화를 넘어, 종교적 제국주의를 거부하고 타자의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철저한 종교다원주의로 나아갔음을 평가한다. 이는 닫힌 경전(책) 중심의 신학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성의 신학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
제8장 & 제9장: 불교적 상상력과 신학적 글쓰기
마지막 두 장은 신학적 '글쓰기' 자체에 대한 성찰이다. 저자는 종교적 언어가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분위기'와 '상상력'을 통해 전달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 글쓰기는 고정된 의미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건이며, 쓰는 주체(에고)가 사라지는 '무주'의 행위이다 .
"가을 강은 거울 빛을 열어서"라는 선시(禪詩)처럼, 신학적 글쓰기는 대상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스스로를 비추도록 허용하는 '비움'의 과정이어야 한다 . 저자는 이를 통해 기독교 신학이 불교적 상상력을 빌려, 교리와 교권의 언어가 아닌 침묵과 여백, 그리고 시적 울림을 가진 언어로 다시 태어나야 함을 역설하며 책을 맺는다.
[서평] 서구 신학의 '안주'를 떠나 '방랑'의 길 위에 선 기독교
김승철 교수의 『무주와 방랑』은 서구 형이상학의 틀 안에 안주해 온 기독교 신학에게 "짐을 싸서 길을 떠나라"고 촉구하는 강력한 초대장이다. 이 책은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을 단순한 비교종교학적 유희나 선교를 위한 문화적 적응(토착화) 차원에서 다루지 않는다. 대신, 저자는 기독교 신학의 가장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 그 뼈대를 이루고 있는 '로고스 중심주의'와 '실체론적 사고'를 불교의 '공(空)'과 '즉비(卽非)'의 논리로 해체한다.
즉비의 논리, 신학의 새로운 문법
이 책의 가장 탁월한 점은 스즈키 다이세츠가 정식화한 '즉비의 논리(A는 A이다. 왜냐하면 A는 A가 아니기 때문이다)'를 기독교 신학의 핵심 문법으로 도입했다는 것이다. 서구 신학이 'A는 A이다'라는 자기 동일성에 갇혀 배타적인 신, 확고부동한 진리, 닫힌 교회를 구축해 왔다면, 김승철은 "하느님은 하느님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다(자기 비움)"라는 논리를 통해 닫힌 신학을 열어젖힌다.
이는 기독교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을 존재론적 실체의 결합이 아닌, 철저한 자기 비움(Kenosis)의 사건으로 재해석하게 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특별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철저히 비워 신이 거할 장소(Chora)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주(머무름 없음)'의 영성은 기독교가 가진 독선과 배타성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해독제가 된다.
토착화를 넘어선 상호 변혁
저자는 한국의 변선환, 일본의 니시다 키타로와 야기 세이이치, 그리고 엔도 슈사쿠 등의 사상을 횡단하며 동아시아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변용되었는지를 추적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토착화'라는 개념조차 넘어서려는 저자의 시도이다. 토착화가 여전히 서구 기독교라는 '씨앗'을 동양이라는 '토양'에 심는다는 위계적 도식을 전제한다면, 저자가 말하는 '대화'는 씨앗 자체의 형질 변경을 요구한다.
변선환 박사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가슴 시리도록 날카롭다. 변선환이 타종교를 신학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세우려 했던 시도는, 서구 신학적 자아를 해체하고 아시아의 종교적 영성으로 다시 태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 책은 그 몸부림이 실패가 아니라, 미래의 신학이 나아가야 할 필연적인 방향임을 '방랑'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웅변한다.
해체, 그리고 글쓰기라는 구원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가 천착하는 '신학적 글쓰기'에 대한 성찰은 이 책을 단순한 학술서 이상의 영성 서적으로 승화시킨다. 신이 죽고, 주체가 사라지고, 거대 서사(역사)가 종언을 고한 포스트모던의 황무지에서 신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저자는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무주(無住)"라고 말한다. 고정된 의미를 전달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빈 종이 위를 흐르는 붓끝처럼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허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이자 신학함이다.
결론적으로 『무주와 방랑』은 기독교인에게는 불교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낯선 얼굴을 마주하게 하는 충격을, 불교인에게는 기독교라는 타자를 통해 자신의 깊이를 재확인하게 하는 기쁨을 선사한다. '정통'이라는 견고한 성 안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진리의 바람이 부는 광야로 나선 모든 구도자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물론 그 나침반은 고정된 북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며 '지금, 여기'의 깨달음을 지시하는 '무주'의 나침반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