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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김기현) 리뷰/요약

 

김기현의 『인간다움』: 4차 산업혁명 시대,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1. 우리는 여전히 인간답기를 바라는가

4차 산업혁명의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며 인공지능(AI)과 생명과학이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지금, 기술의 변화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 내면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이다. 저자 김기현 교수는 기술 문명이 가져올 물리적 변화에만 집중된 세상의 관심사 속에서, 정작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인간다움'의 가치를 묻는다. 인간다움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자부심의 원천이자, 우리가 서로를 평가하고 사회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인간다움을 열망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그저 영리한 동물로 격하하는 진화론적, 유물론적 사고 사이에서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다. 이 책은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공감, 이성, 자유(자율)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었고, 현대와 미래에 어떤 도전을 받고 있는지 추적하는 지적 여정이다.

2.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3가지 기준: 공감, 이성, 자유

공감: 타인을 향한 첫 번째 관문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첫 번째 조건은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나의 것처럼 느끼는 '공감' 능력이다. 이는 사이코패스와 인간을 구별하는 결정적 기준이기도 하다.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나에게 전이시켜 타인에게 가혹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막는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공감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감은 본질적으로 편파적이며,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더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감이 보편적인 인간 존중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성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성: 편파성을 넘어 보편으로

이성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합당한 근거를 찾는 능력이다. 공감이 감정의 영역이라면, 이성은 그 감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돕는 엔진과 같다. 이성은 나에게 친숙한 사람에게만 작동하는 편파적인 공감을 제어하고,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보편적 규범(도덕)을 만들어낸다. "나는 너를 때려도 되지만, 너는 나를 때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불합리함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성의 힘이다.

자유(자율):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힘

마지막 요소는 '자유'다. 여기서의 자유는 단순히 외부의 간섭이 없는 소극적 자유를 넘어, 스스로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개척해 나가는 '자율(적극적 자유)'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강요나 세뇌에 의해 도덕적 행동을 하는 것은 인간답지 않다.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그리고, 그에 책임을 지는 주체적인 모습이 인간다움의 완성이다.

3. 고대: 운명에 이끌리는 삶에서 이성의 발견으로

인간다움의 요소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 시대, 인간은 신화(Mythos)의 세계관 속에서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수동적 존재였다. 그러나 기원전 7~8세기경 철학이 출현하면서 '로고스(Logos)', 즉 이성이 등장했다. 이성은 인간이 신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스스로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고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고대 철학은 이성을 통해 욕망을 통제하고 질서 있는 삶을 사는 것을 인간다운 삶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고대의 이성은 노예나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한계를 지녔으며, 개인보다는 공동체(국가)의 유지를 위한 도구로 기능했다.

4. 중세: 내면세계의 건축과 평등의 씨앗

중세는 흔히 암흑기로 불리지만, 인간다움의 역사에서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기독교의 등장은 '만인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을 퍼뜨리며 고대의 계급적 질서에 균열을 냈다. 비록 현실 사회는 여전히 봉건적 신분제에 묶여 있었으나, 종교적으로 심어진 평등 사상은 훗날 근대적 개인의 탄생을 위한 토양이 되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중세 철학자들은 인간의 내면, 즉 '의지'와 '성찰'의 영역을 깊이 탐구했다. 이는 인간이 외부 세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를 가진 고유한 존재라는 인식(개인의 내면성)을 싹틔웠다.

5. 근대: 개인의 탄생과 인간다움의 완성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과학혁명을 거치며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개인'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르네상스는 신의 영광에 가려져 있던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긍정하며 '인간됨(Humanitas)'을 재발견했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중재 없이 개인이 직접 신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신앙의 개인주의를 열었다. 데카르트와 칸트로 대표되는 근대 철학은 이성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율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확립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공감, 이성, 자유라는 세 가지 요소가 '개인'이라는 그릇 안에서 결합했다. 타인을 나와 동등한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고(공감+이성), 외부의 억압 없이 스스로의 삶을 입법하는(자유) 근대적 인간상이 완성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6. 현대: 포화 속에 흔들리는 위기의 인간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인간다움은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을 특별한 존재가 아닌, 생존 경쟁을 벌이는 동물의 일종으로 격하시켰다. 니체는 이성을 생명력을 억압하는 도구로 규정하며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고, 전통적인 도덕과 공감을 약자의 원한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개인의 자유가 자본주의적 착취를 위한 허울에 불과하다며, 경제적 구조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조들은 인간의 오만함을 깨트리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허무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성에 대한 불신은 파시즘과 같은 광기 어린 전체주의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인간을 유전자 생존 기계로 보는 시각은 윤리의 독자성을 위협했다. 현대인은 인간의 고귀함을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을 물질적 욕망 덩어리로 보는 허무주의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7. 미래: 4차 산업혁명과 인간다움의 새로운 위기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과 생명과학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파도 앞에 서 있다. 이 변화는 과거보다 훨씬 은밀하고 강력하게 인간다움을 위협한다.

인공지능과 자율성의 상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인공지능은 우리의 편의를 돕는다는 명분 아래, 인간의 '선택'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은 우리가 무엇을 볼지, 무엇을 들을지 결정해 준다. 이는 '하이퍼 넛지(Hyper-nudge)'가 되어 개인의 취향과 행동을 은밀하게 조종한다. 인간이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는 과정(이성의 작동)을 기계에 외주화할 때, 인간의 핵심 가치인 자율성은 심각하게 훼손된다. 우리는 편리함의 대가로 삶의 주도권을 알고리즘에 넘겨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지털 소통과 공감의 위기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역사상 가장 많이 연결되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공감 능력은 퇴화하고 있다. 대면 소통에서 얻을 수 있는 비언어적 단서(표정, 목소리 톤 등)가 사라진 텍스트 위주의 소통은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이는 사이버 불링과 같은 온라인상의 잔혹함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것은 인간다움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과학과 도구화된 인간

생명과학의 발달은 노화와 죽음을 극복 가능한 '질병'으로 여기게 만든다. 돈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인간의 생명조차 자본의 논리에 종속될 위험이 크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한계 앞에서 느끼던 겸허함과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은 사라지고,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과 물질 만능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

8.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 없이 미래는 없다

저자는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경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그 방향키를 쥐고 있는 것은 여전히 인간이다. 인간다움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획득한 자산이다. 우리가 인간다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공감, 이성, 자유의 가치를 지키려 노력할 때, 기술은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돕는 풍요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행복은 단순히 쾌락을 채우는 데 있지 않다. 인간다운 품격을 갖추고, 타인과 공존하며,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될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온다. 인간다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면 행복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결국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




[서평] 알고리즘의 시대, 잃어버린 '나'를 찾는 철학적 항해

기술의 편의성에 취해 '영혼'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기현 교수의 『인간다움』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기 앞에서, 우리가 잊고 지냈던 '인간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책이다. 저자는 묻는다. "편리한 기계들에 의존하는 사이 인간다움을 이루는 자산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이 질문은 넷플릭스가 추천한 영화를 보고, AI가 골라준 경로로 운전하며, SNS 속 짧은 글과 이미지로 소통하는 현대인들의 폐부를 찌른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인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공감, 이성, 자유라는 세 가지 구체적인 기둥으로 명확히 구조화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세 가지 요소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싹트고, 자라나고, 위기를 맞았는지 서양 지성사를 관통하며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이성과 감성(공감)을 대립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설정한 점이다. 공감이 도덕의 연료라면, 이성은 그 에너지가 편파적으로 흐르지 않게 조절하는 핸들이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인간은 본능에 휘둘리는 짐승의 차원을 넘어 '자율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책의 후반부,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진단은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다. 저자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터미네이터 식의 미래보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판단과 선택을 알고리즘에 위탁하는 '자율성의 상실'을 더 큰 위기로 지목한다. 이를 '하이퍼 넛지'라고 부르며, 우리의 취향과 행동이 데이터에 의해 은밀하게 조종당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또한, 비대면 소통의 확산이 가져온 '공감 능력의 상실'에 대한 분석은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저하되는 것은... 온라인상의 폭력적 성향도 증가할 것이다"라는 지적은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을 정확히 짚어낸다.

하지만 이 책은 비관론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역사를 통해 인간이 끊임없이 위기를 극복하고 인간다움의 가치를 확장해왔음을 상기시킨다. 인간다움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의 도전 속에서 우리가 지키고 가꿔나가야 할 '과제'임을 역설한다. 기술을 거부하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 주는 혜택을 누리되, 그 과정에서 '주체적인 나'와 '공감하는 우리'를 잃지 않기 위한 치열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다움』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인문학 서적이 아니다. 이것은 독자에게 "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의 주인인가?"라고 묻는 철학적 초대장이다. AI가 답을 대신해 주는 시대, 역설적으로 '질문하는 힘'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더욱 절실해졌다. 이 책은 그 힘을 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 없이는 우리가 꿈꾸는 미래도, 진정한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