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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읽는 한국어사전』(이어령) 리뷰/요약

 

이어령의 《뜻으로 읽는 한국어사전》: 말 속에 숨은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와 미래

1. 언어는 역사의 화살표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그 사회와 문명의 수준을 재는 저울입니다. 저자 이어령은 '말 되네'라는 유행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말이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당연한 것에는 표를 달지 않는 것이 언어의 법칙인데, '말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그만큼 비논리적임을 방증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우리 곁에 폐품처럼 굴러다니는 일상의 말들을 닦고 조여, 한국인의 의식 구조를 파헤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화살표로 삼고자 합니다.

2. 말 속의 우리말 - 한국인의 감성과 지혜

철: 시간을 느끼는 마음

우리말 '철'은 계절(Season)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철이 들었다"는 표현은 계절의 변화를 알고, 시간을 느끼는 마음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현대 문명, 특히 미국식 문명은 냉난방과 비닐하우스 등으로 시간과 장소의 차이를 없앤 '철없는 문명'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나이를 먹는' 한국인의 시간관은 자연과 합일되는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살다와 죽다: 생명에 대한 역설적 애착

한국인은 "좋아 죽겠다", "반가워 죽겠다" 등 감정의 극치에 '죽음'을 끌어다 씁니다. 이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전제로 삶의 가치를 더욱 단단하게 하려는 역설적 생명 존중의 표현입니다. 서양 문명이 죽음을 은폐하고 미화하는 것과 달리, 한국인은 곡(哭) 문화를 통해 슬픔을 문화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살다'라는 말에서 '사람'이 나왔듯, 한국인은 죽음과 삶의 두 바퀴로 인생을 굴려왔습니다.

되다: 끊임없이 생성하는 인간

"사람 됐다", "못됐다"라는 말에서 보듯, 한국인에게 인간은 고정된 존재(Being)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완성되어 가는 생성(Becoming)의 존재입니다. 단군 신화의 곰이 인간이 되는 과정이 이를 증명합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변화를 거듭하는 '되다'의 철학은 한국이 짧은 시간 안에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화를 성취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쓰레기와 시래기: 순환과 재생의 미학

'쓰레기'의 모음 하나를 바꾸면 맛있는 '시래기'가 됩니다. 버려진 헝겊을 이어 아름다운 조각보를 만들듯, 한국 문화는 무가치한 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집는 문화'이자 '리사이클링(Recycling)'의 원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 경영학의 '가비지(Garbage) 이론'이나 자원 재활용과도 맥을 같이하며, 버려진 것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한국인의 슬기를 보여줍니다.

개나리: 집단 지성의 힘

'개'자가 붙은 것은 흔하고 천대받지만, 개나리는 무리 지어 필 때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봄의 전령사가 됩니다. 이는 소수의 엘리트(모란)가 아닌, 대중이 연대하여 시대를 이끄는 '피플 파워(People Power)'와 '지중(知衆)'의 시대를 상징합니다. 한국의 미래는 개나리처럼 서로 어우러져 거대한 불꽃(榮)을 만드는 공동체의 힘에 있습니다.

셈치고: 초합리주의의 지혜

"속는 셈치고", "먹은 셈치고"라는 말은 정확한 계산을 넘어서는 한국 특유의 융통성과 포용력을 보여줍니다. 이는 서구의 기계적 합리주의가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 소외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초합리주의'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엄격한 계산보다는 관계와 기분을 중시하는 '셈 문화'는 삭막한 현대 사회에 훈훈한 인간미를 불어넣습니다.

정(情)과 관계의 언어들

  • 괜찮다: '관계하지 않다'에서 온 말로, 너와 나의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가 깃들어 있습니다. 남을 배려해 자신의 고통을 숨기는 내면의 언어입니다.

  • 한가지: '마찬가지'의 어원으로, 개별적인 잎사귀(개인)와 뿌리(집단) 사이를 잇는 '가지'의 의식을 뜻합니다.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조화를 모색하는 키워드입니다.

  • 깨소금 맛: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심리 이면에, 이웃을 경쟁 상대로 삼아야 했던 농경 사회의 폐쇄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는 세계로 시야를 돌려야 할 때입니다.

3. 말 속의 한자말 - 동아시아의 사상과 한국적 변용

주(主)와 나그네: 주인의식의 회복

민주주의의 '주(主)'는 촛불의 심지가 타오르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의미합니다. 반면 현대인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듯 삶의 현장에 개입하지 않는 방관자, 즉 '나그네(노마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의 진정한 주인은 정보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판단하는 깨어있는 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기(氣): 논리를 넘어서는 힘

'기'는 이치(理)나 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 사기, 생명력을 뜻합니다. 서양의 합리주의가 한계에 부딪힌 지금, 논리로 따지는 것보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흐름을 파악하는 '기'의 철학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기'가 탁해지거나 꺾였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개혁(改革): 가죽을 무두질하는 고통과 인내

'혁(革)'은 짐승의 생가죽(皮)에서 털을 뽑고 기름을 빼 부드럽게 무두질한 상태를 말합니다. 개혁은 단순히 껍질을 벗기는 피의 숙청이 아니라, 뻣뻣한 사회 조직을 유연하고 탄력 있게 만드는 인고의 과정(무두질)이어야 합니다.

사회(社會): 회사 인간을 넘어서

'사회'는 서양의 '소사이어티(Society)'를 번역한 말로, 원래는 친구나 동료들의 모임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전통 때문에 가정과 국가 사이의 중간 단계인 '사회(시민사회)' 개념이 약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사회인'보다 '회사인'으로 살아가며, 공익보다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진정한 사회는 친구(Fellow)처럼 대등한 관계망 속에서 형성됩니다.

민(民):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깨어남으로

갑골문자에서 '민(民)'은 노예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르는 형상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는 지배층이 정보를 독점하고 백성을 맹목적인 복종자로 만들었던 역사를 보여줍니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이 정보에 눈을 뜨는 '개안(開眼)'에서 시작됩니다. 정보의 격차를 없애고 누구나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

공(公)과 사(私): 열린 것과 닫힌 것

'공(公)'은 사방으로 열려 있는 모습(八)을, '사(私)'는 안으로 굽은 팔의 모습(厶)을 하고 있습니다. 공직자는 자신의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감수하고, 사심 없이 공평하게 업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투명한 공개만이 부패를 막고 신뢰 사회를 만드는 길입니다.

휴(休): 창조적 쉼의 미학

'휴(休)'는 사람이 나무 그늘에서 쉬는 모습입니다. 서양의 개척자가 나무를 베어 열매를 얻으려 했다면, 동양은 나무 그늘에서 쉬며 정신적 풍요를 얻었습니다. 쉼은 비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뉴턴의 사과처럼 위대한 발견을 낳는 창조의 시간입니다. 21세기는 노는 산업, 쉬는 산업이 주도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4. 제3부: 말 속의 서양말 - 글로벌 시대의 생존 전략

비저너리(Visionary): 몽상가가 세상을 바꾼다

단순히 현실을 관리하는 자가 아니라, 엉뚱해 보일지라도 미래의 꿈(Vision)을 제시하는 '비저너리'가 세상을 이꿉니다. 서양의 '드림(Dream)'은 실현 가능한 목표인 반면, 동양의 '몽(夢)'은 허망한 꿈으로 치부되곤 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꿈을 '비전'으로 구체화하여 소프트 파워를 길러야 합니다.

이콜로이코노미(Ecoloeconomy): 경제와 생태의 공존

경제(Economy)와 생태(Ecology)는 모두 '집(Eco)'을 어원으로 합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경제 개발이 아니라, 환경을 보전하며 이익을 창출하는 '생태 경제'가 21세기의 핵심 산업입니다. 쓰레기에서 자원을 얻고, 자연을 즐기며 보호하는 생태 관광(Ecotourism) 등이 그 예입니다.

니치(Niche): 틈새에 사는 지혜

'참치'처럼 끊임없이 헤엄쳐야 사는 물고기가 있는가 하면, '가자미'처럼 바닥에 붙어 사는 물고기도 있습니다. 생태계의 모든 생물은 저마다의 생존 영역(Niche)이 있습니다. 기업과 국가도 무모한 경쟁보다는 자신의 특성에 맞는 '틈새(Niche)'를 찾아 전문화할 때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습니다.

라이벌(Rival): 함께 강물을 마시는 사이

'라이벌'은 '같은 강물(River)을 마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적(Enemy)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만, 라이벌은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입니다. 흑백 논리에 갇혀 상대를 적으로만 규정하는 '군사 문화'를 청산하고,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라이벌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NIH(Not Invented Here)와 디즈니 철학

디즈니랜드의 성공 비결은 "여기에서 발명되지 않은 것은 없다"는 독창성(NIH)에 있습니다. 남의 것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통 하나부터 서비스 방식까지 철저하게 자신들만의 철학으로 창조해낸 것입니다. 세 살 때의 감동이 평생을 가듯,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만의 독창적인 꿈과 문화를 심어주어야 합니다.




[서평] 언어의 지층에서 캐낸 한국인의 미래 지도: 이어령의 《뜻으로 읽는 한국어사전》

언어, 생각의 집이자 문명의 저울

이어령 선생의 《뜻으로 읽는 한국어사전》은 단순히 단어의 뜻을 풀이하는 실용서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 속에 숨겨진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문화적 DNA, 그리고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을 탐구하는 인문학적 통찰의 보고(寶庫)다. 저자는 언어를 "사회와 문명의 저울"이자 "미래의 새 길을 알려주는 화살표"라고 정의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비교 문화적 관점'이다. 저자는 우리말 '철'과 영어의 'Season', '죽다'와 'Die', '빈대떡'과 'Pizza' 등 동서양의 언어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그 속에 담긴 사고방식의 차이를 명쾌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어, 서양의 'Education'이 아이를 독립적인 개체로 키우는 '젖 떼기(drawing out)'의 의미라면, 한국의 '가르치다'는 밭을 갈아엎어 생명력을 북돋우는 '밭갈이'와 같다는 해석은 교육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과거의 화석이 아닌 미래의 나침반

저자는 옛말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낡은 언어 속에 갇힌 우리의 의식을 깨뜨리고자 한다. '비(非)'라는 글자가 서로 등 돌린 새의 날개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풀이를 통해, 두 날개가 균형을 이뤄야 날 수 있듯 우리 사회의 좌우 대립과 갈등을 조화와 균형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개나리'를 통해 소수의 영웅이 아닌 대중의 지성(집단 지성)이 이끄는 정보화 사회의 도래를 예견하고 , '라이벌'의 어원을 통해 적대적 경쟁이 아닌 공존의 경쟁을 제안한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한국인의 '가족주의'와 '관계 지향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대목이다. '남'이 아니라 '우리'를 강조하고, 이치(理)보다 기(氣)를, 법보다 정(情)을 앞세우는 한국인의 특성이 전근대적인 유물이 아니라, 인간 소외를 겪는 현대 사회의 대안적 가치, 즉 '하이 터치(High Touch)' 감성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디지털 기술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입힌 저자의 후기 사상인 '디지로그(Digilog)'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의 힘

이 책은 IMF 외환위기 이전에 쓰인 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오히려 '개혁', '공정', '환경', '창의성' 등 현재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는 문제들에 대해 본질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개혁'이 가죽을 무두질하듯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는 조언 이나, '공(公)'직자가 사생활을 공개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지적 은 오늘날의 정치, 사회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더욱 뼈아프게 다가온다.

우리는 지금 언어의 인플레이션 시대에 살고 있다. 뜻도 모른 채 남발되는 외래어와 혐오 표현이 난무한다. 이어령 선생은 "언어의 해체는 의미 우주의 붕괴"라고 경고했다. 이 책은 우리가 잃어버린 말의 품격을 되찾고, 말 한마디에 담긴 문화적 무게를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길잡이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 창의적인 영감을 얻고자 하는 기획자,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