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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다 듣다 걷다』(이어령) 리뷰/요약

 

 이어령의 《먹다 듣다 걷다》: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세 가지 동사

1. 정지된 명사에서 역동적인 동사로

이 책은 이어령 박사가 '기독교 사회복지 엑스포' 주제 콘퍼런스에서 강연한 내용을 바탕으로 집필되었습니다. 저자는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대사회적 섬김의 본질을 '먹다', '듣다', '걷다'라는 세 가지 동사로 압축하여 제시합니다. 기독교는 그동안 '영생', '빛', '소금'과 같은 명사 중심의 존재론적 관점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성육신하여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역동적인 사건(event)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는 도덕적 덕목으로 축소된 명사가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동사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인간과 같아지기 위해 먹고, 듣고, 걷는 행위로 뛰어드셨기 때문입니다.

2. 먹다 - 육신의 빵을 넘어 생명의 빵으로

한국인의 식문화와 성경의 접점

한국인은 '먹는 것'을 유독 중시하는 민족입니다. 나이도 먹고, 욕도 먹고, 축구 경기에서 골도 먹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한국인의 특성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성경 역시 선악과를 먹는 이야기로 시작해 최후의 만찬으로 이어지는 '먹는 이야기'의 연속임을 지적합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을 통해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몸과 피로 비유하며 먹는 행위의 차원을 승화시키셨습니다.

밀레의 그림으로 보는 기독교적 복지

저자는 밀레의 명화 <이삭 줍는 여인들>과 <만종>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적 나눔을 설명합니다. <이삭 줍는 여인들>은 단순한 사회 고발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수확물을 싹쓸이하지 않고 이삭을 남겨두라는 신명기와 레위기의 말씀(신 24:19, 레 19:9-10)을 실천하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부자에게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 하지 않으시고, 실수를 가장해 이삭을 흘려 가난한 자들이 자존감을 잃지 않고 노동을 통해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지의 원형입니다. 반면 현대 사회는 트랙터로 싹쓸이하여 '국물'도 없는 삭막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만종>에 등장하는 부부는 가난한 노동자이지만, 땅에서 얻은 소산이 자신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기에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비록 엑스선 투시 결과 바구니가 죽은 아기의 관일지도 모른다는 해석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밥을 먹을 때, 내 노력보다 햇빛과 비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큼을 알고 감사 기도하는 것이 기독교적 삶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먹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지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이것이 본질적인 목적이 아님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체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군중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마귀의 시험을 거부하셨습니다. 돌로 만든 빵은 생명이 없어 고갈되지만, 씨앗이 자라 맺은 곡식은 생명이 있어 순환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먹고 죽을 육신의 빵(돌멩이 빵)을 주는 곳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빵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주어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의 양식을 주시고 대신 목마름을 짊어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3. 듣다 - 시각의 시대를 넘어 청각의 영성으로

보는 문화 vs 듣는 문화

서구 헬라 문화는 시각 중심(Icon)이지만, 히브리 문화는 청각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시고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현대인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며 보는 것을 중시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 10:17)라는 말씀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듣는 것입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사역보다 앞서는 말씀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르다는 접대 준비로 분주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불평하는 마르다에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시며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이는 봉사(디아코니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로고스)을 듣는 것이 우선순위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마르다처럼 너무 분주합니다. 봉사와 사역에 치여 정작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사회 참여와 봉사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질문과 말씀 듣기가 선행되지 않은 봉사는 정치적 포퓰리즘이나 단순한 NGO 활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의 복지는 세상과 똑같이 빵을 나누더라도, 그 안에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의 말씀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4. 걷다 - 상생과 생명을 향한 거룩한 행진

걷기의 영성과 인문학적 의미

걷는다는 것은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자,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대면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 등 4대 성인은 모두 길 위에서 가르침을 전한 '걷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걷기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몸으로 쓰는 역사이며, 땅과 접속하여 생명의 리듬을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미국의 평화 운동가 '피스 필그림(Peace Pilgrim)'은 28년간 4만 km를 걸으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녀는 가진 것 없이 걸으며 내면의 평화가 없이는 세상의 평화도 없음을 증거했습니다. 반면 현대인은 걷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운송 수단에 실려 배달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구도자의 걷기는 편안함을 거부하고 고행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걷기와 엠마오 도상

예수님의 생애는 끊임없는 걷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그리고 사마리아를 통과하며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평생 걸으신 거리는 지구 한 바퀴에 달합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주시고 빵을 떼어 주실 때 비로소 영의 눈이 뜨였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기도 걷기: 상생의 실천

저자는 한국 교회에 '기도 걷기'를 제안합니다. 스마트폰 앱 등을 활용해 성도들이 매일 걷고, 그 걸음 수만큼 적립된 기금을 가난한 이웃이나 아프리카 난민을 위해 기부하는 것입니다. 내 건강을 위해 걷는 행위가 동시에 타인을 살리는 기도가 되고 물질적 후원이 되는 '상생의 걷기'입니다.

서구 문명은 경쟁과 포식의 역사였지만, 이제는 공생(Symbiosis)의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걷기는 철저히 이타적인 걸음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채 머물지 말고,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신 것처럼, 남들이 가지 않는 곳, 소외된 곳으로 걸어가 생명의 물을 전해야 합니다.

5.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육신의 목마름을 해결할 물뿐만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의 공동체이자, 그 생명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걷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육의 양식을 넘어 영의 양식을 전하고,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며 함께 걷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이자 진정한 대사회적 섬김입니다. "먹고, 듣고, 걸어라." 이것이 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수행해야 할 명령입니다.




[서평] 생명의 동사로 다시 쓰는 기독교: 《먹다 듣다 걷다》를 읽고

명사(名詞)에 갇힌 신앙을 깨우는 동사(動詞)의 영성

이어령 박사의 《먹다 듣다 걷다》는 한국 지성사의 거장이 남긴 영적 유산이자, 위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향한 애정 어린 쓴소리와 희망의 제안을 담고 있다. 저자는 평생을 언어와 문화의 최전선에서 싸워온 인문학자답게, 기독교의 진리를 딱딱한 교리가 아닌 생동감 넘치는 세 가지 동사 '먹다, 듣다, 걷다'로 치환하여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기독교 신앙을 '관념'에서 '실체'로 끌어내린다는 점이다. 저자는 한국 교회가 그동안 '믿음', '구원', '천국'과 같은 추상적인 명사에 갇혀 있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동사적이었다.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끊임없이 '걸으셨다'. 이 책은 신앙이 머리 속의 동의가 아니라, 손과 발, 입과 귀로 행하는 구체적인 삶의 양식이어야 함을 역설한다.

인문학적 통찰로 재해석된 성경과 예술

저자의 탁월함은 성경 텍스트를 인문학적 지식, 그리고 예술 작품과 융합하여 해석하는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 특히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에 대한 해석은 압권이다. 흔히 전원적인 풍경이나 빈곤에 대한 묘사로 읽히는 이 그림에서, 저자는 구약 성경 레위기의 '이삭 줍기' 율법을 길어 올린다. 싹쓸이하지 않고 가난한 자를 위해 일부러 남겨두는 '국물'의 미학, 그것이 성경적 복지의 원형이라는 통찰은 현대의 기계적이고 제도적인 복지가 놓치고 있는 '자비'와 '존엄'의 가치를 일깨운다.

또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일화를 통해 '사역의 과잉'에 빠진 현대 교회를 꼬집는 대목은 뼈아프다. 봉사와 섬김이라는 이름으로 분주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을 듣는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세상과 똑같은 빵을 주면서 기독교 복지라고 자위하지 말라는 일갈은,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유일하고 독보적인 것이 무엇인지(생명의 빵)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상생을 위한 걷기, 교회의 미래

책의 후반부에서 제안하는 '걷기'는 단순한 건강법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선교 방식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저자는 '기도 걷기'라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하며, 걷는 행위가 나 자신의 건강을 넘어 타인을 돕는 기부와 기도로 이어지는 '상생'의 구조를 꿈꾼다. 이는 경쟁과 도태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대안적 삶의 방식이다. 스스로 길을 내며 걸어가는 것, 안주하지 않고 소외된 곳(사마리아)을 향해 걷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교회의 증거이다.

다시, 예수의 길 위에서

《먹다 듣다 걷다》는 신학 서적이 아니지만, 그 어떤 신학 책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지성의 문지방을 넘어 영성의 세계로 들어온 노석학의 시선은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다. 그는 한국 교회가 세상의 비난 속에서 위축되지 말고,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당당하게 먹이고, 듣고, 걸으라고 격려한다. 이 책은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진 성도들에게는 영적 야성을 회복하는 자극제가,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목회자들에게는 명확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으나 빵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을 끌어안고, 영원한 생명의 빵을 향해 걷는 순례의 길에 이 책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