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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클래식』(권혁일) 리뷰/요약

 


『백투더 클래식』: 영성 고전으로 오늘을 읽다

1.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오늘을 조망하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이성주의, 합리주의, 과학주의가 지배하며 상상력과 경이가 메말라가는 건조한 시대입니다. 현대인들은 신비와 영성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시대일수록 '기독교 영성 고전'을 읽는 것은 시대를 거스르는 용기 있는 행동이 됩니다. 이 책은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의 연구원들이 과거의 영성가들이 남긴 고전을 통해 현대 사회의 소비주의, 피로, 불의 등의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한 결과물입니다.

2. 신비와 경이 (Mystery & Wonder)

제1부는 이성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 잃어버린 '신비'와 '경이'를 회복하는 영성가들의 통찰을 다룹니다.

2.1. 호기심을 넘어 경이로: 아우구스티누스

현대 과학은 인간의 호기심(curiosity)을 찬양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안목의 정욕'이라 하여 죄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curiositas)'과, 이미 아는 진리를 사랑하여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면학심(studiositas)'을 구분했습니다. 참된 지적 탐구는 대상을 정복하려는 호기심이 아니라, 알면 알수록 놀라워하며 대상을 '너(You)'로 대하는 '경이(wonder)'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2.2. 영적 감각의 회복: 오리게네스와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영화 <퍼펙트 센스>가 육체적 감각의 상실 속에서도 사랑을 발견하듯, 초대 교회 교부들은 인간에게 육체적 오감을 넘어서는 '영적 감각'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적으로 보고, 듣고, 맛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타락으로 인해 닫힌 이 감각을 영성 훈련을 통해 회복해야 하며, 이를 통해 좁은 오두막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2.3. 신나는 맞바꿈: 마르틴 루터

루터에게 믿음은 단순한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신부인 영혼과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연합하는 결혼반지입니다. 이 연합을 통해 '신나는 맞바꿈'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죄와 절망은 그리스도에게 넘어가고,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은 우리 것이 됩니다. 이 역설적인 자유는 그리스도인을 모든 것의 주인이자 동시에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만듭니다.

2.4. 영혼의 성, 내면의 수정 궁전: 아빌라의 테레사

아빌라의 테레사는 인간의 영혼을 다이아몬드나 맑은 수정으로 된 거대한 궁전으로 묘사했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억압받던 여성으로서, 그녀는 자신의 내면 중심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놀라운 자존감을 보여주었습니다. 현대인들이 외부의 스펙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할 때, 테레사는 우리 영혼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거하시는 존귀한 성임을 일깨우며, 겸손을 통해 그 중심에 이를 것을 권합니다.

2.5. 에펙타시스, 끝없는 목마름: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우리는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권태가 없습니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기에 우리는 그분을 영원히 다 알 수 없으며, 알면 알수록 더 큰 갈망을 느끼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를 '에펙타시스(epektasis)', 즉 푯대를 향해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영혼의 전진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정체된 만족이 아니라 영원한 경탄과 호기심의 여정입니다.

2.6. 하나님과 연애하기: 잔느 귀용

잔느 귀용은 『아가서 주석』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의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그녀는 육체적 고통과 결혼 생활의 아픔을 승화시켜 그리스도를 최고의 연인으로 삼았습니다. 그녀의 영성은 하나님을 멀리 계신 초월자가 아니라, 일상과 감옥 속에서도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연인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2.7. 어머니 하나님: 노리치의 줄리안

흑사병이 창궐하던 절망의 시대에 줄리안은 "모든 것이 다 잘 되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우리를 낳으신 예수님을 '어머니'로 인식했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듯, 하나님은 그 무한한 사랑으로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줄리안의 계시는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이 우주를 지탱하는 힘임을 보여줍니다.

2.8. 일상의 성소: 로렌스 수사

로렌스 수사는 수도원의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요리를 하는 허드렛일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아니라,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영성 훈련임을 보여주었습니다.

3. 훈련과 형성 (Discipline & Formation)

제2부는 비뚤어진 욕망과 사회 구조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형성되기 위한 구체적인 훈련과 실천을 다룹니다.

3.1. 영적 독서를 위한 조언: 존 웨슬리

존 웨슬리는 감리교도들에게 끊임없는 영적 독서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정보 습득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변화를 위한 독서를 제안합니다. 순수한 의도로 시작하고, 읽은 내용을 깊이 묵상(기억)하며 반복하고, 읽은 내용이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기도하는 것, 이것이 웨슬리가 제안하는 영적 독서의 방법입니다.

3.2. 회심과 강철 우리: 조나단 에드워즈

막스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의 '강철 우리(iron cage)'에 갇힌 현대인들에게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심론은 강력한 도전이 됩니다. 에드워즈에게 회심은 단순한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자기 사랑(self-love)에서 벗어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새로운 성향(inclination)을 갖게 되는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회심만이 탐욕의 구조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3.3. 소비주의와 비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에크하르트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상인'으로 규정하며,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종교적 태도를 비판했습니다. 선행이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대가를 바라는 것은 소비주의적 영성입니다. 그는 우리의 내면에서 욕심을 비우고 하나님이 거하실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굿 딜(Good Deal)'입니다.

3.4. 가난의 영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가난 부인(Lady Poverty)'으로 의인화하여 칭송했습니다. 그에게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따르기 위한 자유의 통로였습니다. 그는 자발적 가난을 통해 소유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대하는 생태적 영성을 실천했습니다. 이는 번영신학에 물든 현대 교회에 경종을 울립니다.

3.5. 사막의 지혜: 사막 교부들

세속화된 교회를 떠나 사막으로 들어간 교부들은 철저한 고독과 침묵 속에서 내면의 욕망과 싸웠습니다. 그들은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자신의 죄를 보고 애통해했습니다. "내 구원을 위해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묻는 절박함 속에서 그들은 참된 지혜를 얻었습니다. 사막은 도피처가 아니라 영적 전투의 현장이자 생명의 꽃을 피우는 곳이었습니다.

3.6. 고상한 욕망: 디트리히 본회퍼 (지라르의 렌즈로)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갑니다. 본회퍼는 이러한 저급한 욕망 대신,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고상한 욕망'을 가질 것을 주문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문제 해결사(Deus ex machina)로 이용하는 종교성을 거부하고,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날 것을 역설합니다.

3.7. 제도 교회 밖의 길: 조지 폭스와 존 버니언

타락한 제도권 교회에 실망한 조지 폭스는 내면의 빛을 따르는 퀘이커 운동을 시작했고, 존 버니언은 감옥에서 『천로역정』이라는 이야기를 써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과 진리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 신앙의 본질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현대의 '가나안 성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3.8. 영성 생활은 리듬이다: 베네딕트의 규칙서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공동체 생활을 위한 규율이지만, 그 핵심은 삶의 '리듬'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기도와 노동의 균형(Ora et Labora)을 통해 일상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만드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규칙은 억압이 아니라, 무질서한 삶을 거룩하게 빚어가는 거푸집과 같습니다.

4. 이웃과 정의 (Neighbor & Justice)

제3부는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이 어떻게 사회적 정의와 이웃 사랑으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줍니다.

4.1. 공감을 넘어 긍휼로: 안토니우스

사막의 성자 안토니우스는 홀로 수행했지만,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억울한 자들의 탄원과 병자들의 신음에 마음이 요동쳐(긍휼)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참된 영성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단순한 공감을 넘어,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는 긍휼(compassion)로 나아갑니다.

4.2. 부의 공공성: 바실리우스

바실리우스는 부와 재물이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공공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은 가난한 자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과 같다고 설교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권만을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부의 사회적 책임과 나눔의 의무를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4.3. 예언자적 영성: 길선주와 이기풍

한국 교회의 초기 지도자 길선주는 3.1 운동에 참여하며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불의한 권력에 저항했습니다. 이들의 영성은 개인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예언자적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4.4. 순수 기독교로의 귀환: 디트리히 본회퍼

본회퍼는 나치에 저항하며 옥중에서 '비종교적 기독교'를 사색했습니다. 그에게 순수 기독교란 현실을 도피하는 종교가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며 불의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4.5. 사교클럽에서 벗어나라: 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버밍엄 감옥에서 쓴 편지를 통해, 교회가 정의를 외면한 채 안주한다면 단순한 사교클럽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어느 한 곳의 불의는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고 말하며, 기독교인은 불의한 법에 저항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4.6. 민본 기독교: 김교신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통해 조선의 얼이 담긴 기독교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교세 확장에 몰두하는 교회를 비판하며, 백성(民)을 근본으로 삼는 '민본 기독교'를 주창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조선의 민중들에게 복음이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은 오늘날 대형화된 한국 교회에 큰 울림을 줍니다.

4.7. 비리디타스와 여성 리더십: 힐데가르트

중세의 여성 신비가 힐데가르트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비리디타스(Viriditas, 녹색 생명력)'라는 독창적인 사상을 펼쳤습니다. 그녀는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이 조화를 이루는 생태적 영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현대의 에코페미니즘과 맞닿아 있으며, 파괴된 자연과 억압된 여성성을 회복하는 치유의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서평] 마르지 않는 영성의 샘을 길어 올리다

"왜 지금 다시 고전인가?"

권혁일 엮음, 『백투더 클래식』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실하고도 묵직한 대답을 내놓는다. 스마트폰의 알람과 SNS의 타임라인이 우리의 일상을 조각내는 '피로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은 역설적으로 영적인 목마름을 호소한다. 이 책은 21세기의 황폐한 영적 토양 위에 1,500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의 거장들을 소환한다.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마틴 루터 킹까지, 사막의 교부들부터 함석헌의 벗 김교신까지, 시공간을 초월한 23명의 영성가들이 9명의 젊은 신학자들의 필치를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현대적 언어로 번역된 고전의 지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가교(架橋)'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고전은 읽히지 않기에 고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이 책의 필자들은 고전 텍스트를 박제된 유물로 두지 않는다. 그들은 디즈니의 <겨울왕국> 엘사를 통해 아빌라의 테레사가 말한 '내면의 성'을 설명하고 , 영화 <퍼펙트 센스>를 통해 교부들의 '영적 감각'론을 풀어낸다. 막스 베버의 '강철 우리' 이론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심을 재해석하는가 하면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소비 패턴인 '굿 딜(Good Deal)'을 영성적으로 비판한다. 이러한 현대적 적용은 고전이 가진 난해함의 문턱을 낮추고, 독자로 하여금 "아, 이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구나"라고 무릎을 치게 만든다.

균형 잡힌 영성의 스펙트럼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영성의 균형을 잡는다. 1부 '신비와 경이'에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내면의 변화를 다루며 영성의 깊이를 더한다. 2부 '훈련과 형성'에서는 구체적인 삶의 규칙과 실천을 통해 성품이 빚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3부 '이웃과 정의'에서는 그 영성이 개인의 골방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책임과 정의의 실천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특히 한국 교회 풍토에서 자칫 간과하기 쉬운 '사회적 영성'을 다룬 3부는 이 책의 백미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무력했던 우리에게 안토니우스의 긍휼과 바실리우스의 부의 공공성 개념은 뼈아픈 성찰을 요구한다. 또한, 본회퍼와 마틴 루터 킹, 그리고 김교신의 외침은 기독교가 사교클럽이나 개인의 심리적 위안처가 아니라, 불의한 시대에 저항하고 약자와 연대하는 예언자적 공동체여야 함을 상기시킨다.

나가는 글

『백투더 클래식』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독자를 '거인들의 어깨' 위로 초대하여 더 멀리, 더 깊이 보게 한다. 각 장의 끝에 소개된 원전 정보는 독자가 2차 텍스트를 넘어 1차 텍스트의 바다로 항해할 수 있도록 돕는 친절한 안내판이다. 소비주의에 젖어 '가성비' 따지는 신앙생활에 지친 이들, 교회의 세속화에 실망하여 '가나안 성도'가 된 이들, 그리고 진정한 영적 성장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마르지 않는 생수를 길어 올릴 수 있는 깊은 우물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