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cker

6/recent/ticker-posts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우치다 다쓰루) 리뷰/요약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 요약

1. 앎에서 욕망으로: 난해함의 전략과 아이의 물음

철학서의 난해함은 의도된 전략이다

레비나스와 라캉의 저작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대부분 "무엇이 쓰여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저자인 우치다 다쓰루는 이것이 저자의 무능력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의도된 텍스트 퍼포먼스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난해함은 저자의 지적 과시가 아니라, 독자에게 특정한 태도 변화를 요구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아이의 담화와 어른의 유도

라캉은 '아이의 담화'라는 개념을 통해,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던지는 "왜?"라는 질문이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당신은 왜 그 말을 나에게 하는가?"라는 욕망의 탐색임을 지적합니다. 아이는 어른의 말 표면에 있는 의미보다 그 이면에 숨겨진 욕망을 직감합니다. 레비나스와 라캉은 독자를 이러한 '아이의 위치'에 두어, 텍스트의 의미가 아닌 글쓴이의 욕망을 쫓는 읽기로 유도합니다. 즉, 독자는 '텍스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넘어 '저자는 왜 이렇게 난해하게 씀으로써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앎(Savoir)에서 욕망(Désir)으로의 이동

이 책은 독자에게 지식의 습득이 아닌, 욕망의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라캉은 이를 '앎으로부터 욕망으로(au désir du savoir)'의 이동이라고 표현합니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이미 완성된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독자 자신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과정입니다. 위대한 텍스트는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사실을 만나게 하고, 그 경험이 다시 텍스트의 심층을 비추는 순환 구조를 가집니다.

2. 텍스트, 스승, 그리고 타자: 배움의 구조

완전기호로서의 텍스트와 스승의 필요성

유대교의 경전인 탈무드와 같은 텍스트는 '완전기호'로 기능합니다. 완전기호는 무한한 독해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며, 결정된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텍스트로부터 무한한 의미를 길어 올리기 위해서는 혼자가 아닌 '스승'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스승은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방법'을 전수하는 존재입니다.

스승으로서의 타자 (Autrui comme maître)

스승은 제자에게 '타자성'의 모델을 제공합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지식의 양적 차이가 아니라, '위치'의 차이에서 옵니다. 스승은 '알고 있다고 상정된 주체'로서 기능하며, 제자는 스승이 가진(것으로 추정되는) 수수께끼를 욕망하게 됩니다. 제자는 스승의 호출에 응답하여 자신의 외부로 나아가는 주체적인 운동을 시작합니다.

장량과 황석공의 일화: 절대적 뒤처짐

우치다 다쓰루는 장량이 황석공의 신발을 주워주는 일화를 통해 배움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장량은 스승의 기이한 행동(신발을 떨어뜨리는 행위)을 통해 자신이 모르는 게임의 룰이 있음을 직감하고, 자발적으로 '절대적 뒤처짐(패배)'의 위치를 선택합니다. 배움은 스승이 가진 실체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을 괄호 치고 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약(break-through)입니다.

반복과 수수께끼의 구조

수수께끼는 단독으로 성립하지 않고, 반복을 통해 생성됩니다. 라캉은 주사위 게임이나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분석을 통해, 어떤 행위가 두 번 반복될 때 비로소 '상징계'가 열리고 의미화 작용이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장량이 황석공의 신발을 두 번째로 주워주었을 때, 그는 우연이 아닌 필연적 법칙(상징)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 것입니다.

3. 이중화된 수수께끼와 독학자의 한계

대면과 제삼자의 소환

진정한 대화는 '나'와 '너'의 2자 관계가 아니라, 그 사이에 '제삼자(중간적인 것/장어)'가 개입하는 3자 협의의 구조를 띱니다. 모리스 블랑쇼가 말했듯, "똑같은 하나를 말하기 위해서는 두 명의 인간이 필요합니다". 이는 신의 말이 단일한 파롤에 담기지 않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끝없는 대화와 주해를 통해서만 생성됨을 의미합니다.

저주받은 독학자

유대교 전통에서 스승 없이 혼자 공부하는 독학자는 경계의 대상입니다. 독학자는 타자를 자신과 동등한 '타아(Alter Ego)'로 환원하고, 텍스트에서 자신의 이미 알고 있는 지식만을 재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독학자는 세계를 자신의 빛으로 비추어 소유하려 하며, 이는 타자의 고유한 타자성을 동일자로 환원하는 폭력적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타아(Alter Ego)와 타자(Autre)의 구별

후설의 현상학에서 '타아'는 나의 상상적 변용태이자, 나와 세계를 공유하는 동료입니다. 반면 레비나스의 '타자'는 나와 공통의 도량형을 갖지 않는 절대적으로 외부적인 존재입니다. 타자는 나의 이해나 공감을 넘어서 있으며, 나의 세계에 포섭되지 않는 '이방인'입니다.

괄호 치기와 전언 철회

레비나스의 텍스트가 난해한 이유는 그가 '전언 철회(se dédire)'의 어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중요한 개념(신, 무한 등)을 말할 때, 그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부정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이나 '신'을 유한한 언어 속에 가두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입니다. 기호는 대리 표상일 뿐이며, 그 기호가 가리키는 본질은 기호 너머에 있음을 '괄호 치기'를 통해 보여줍니다.

4. 죽은 자의 절박: 타자는 곧 죽은 자다

죽은 자가 발휘하는 힘

사체는 물리적으로는 소멸해가는 물질이지만, 산 자들의 행동을 강력하게 속박하는 힘을 가집니다. 인류가 유인원과 구별되는 지점은 장례 의식을 통해 '죽은 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과 관계 맺기 시작한 데 있습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는 종종 '죽은 자'와 겹쳐집니다.

홀로코스트와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레비나스의 철학은 2차 대전 중 홀로코스트로 가족과 동포를 잃고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를 알 수 없으며, 죽은 자들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유책성(책임)'을 느낍니다. 이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타인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인과율을 벗어난 윤리입니다.

존재론의 어법을 넘어서

레비나스는 죽은 자들을 '존재론의 어법(있다/없다)'으로 말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존재론적으로 죽은 자를 다루는 것은 그들을 산 자의 세계로 소환하여 도구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Autrement qu'être)' 죽은 자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죽은 자를 '존재하지 않음'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무의 이분법을 넘어선 차원에서 그들의 흔적을 보존하려는 시도입니다.

대역(Substitution)으로서의 주체

레비나스의 주체는 '대역(Substitute)'입니다. 주체는 자신의 능력이나 자질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이곳에 없는 타자(죽은 자/신)'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서 있는 존재로서 정의됩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Me voici)"라는 선언은 주체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여 자신을 타자의 인질이자 대역으로 바치는 행위입니다.

5. 죽은 자로서의 타자와 윤리의 기원

죽은 후의 나: 전미래형의 시간

우리는 자신의 삶을 평가할 때, 마치 내가 죽은 후의 시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듯한 '전미래형'의 시간 의식을 사용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세속인'의 시간(과거->미래)과 달리, 윤리적 주체는 '죽은 후의 나'라는 가상의 시점에서 현재의 나를 심판합니다.

프로이트의 원부 살해와 양심의 가원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양심과 윤리의 기원을 '죽은 아버지(원부)'에 대한 죄책감에서 찾았습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형제들은 죽은 아버지에 대한 사후적 복종과 자책을 통해 도덕과 종교를 만들어냅니다. 레비나스 역시 윤리의 기원을 타자에 대한 근원적인 죄의식과 책임감에서 찾습니다.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한 무한한 책임

레비나스의 윤리에서 가장 충격적인 점은 "우리는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유책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실제로 타자를 박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타자를 알기 이전의 '과거(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 이미 타자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존 자체가 누군가의 자리를 차지한 결과일 수 있다는 인식, 즉 '자신의 존재함에 대한 사과'가 레비나스 윤리의 핵심입니다.

선(Good)의 기초

인간의 선성은 신의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책하는 나'를 통해 기초 지어집니다. 신이 없는 세계, 보상이 없는 세계에서도 타자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 즉 '사심 없음(dés-inter-essement)'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윤리입니다.




[서평] 우치다 다쓰루가 안내하는 레비나스: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

1. 난해함을 넘어선 '오해'의 미학: 독학자를 위한 변명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는 철학서라기보다, 철학이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는 '등산 가이드북'에 가깝다. 저자는 레비나스 철학의 난해함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난해함이 독자를 '제자'의 위치로 유도하는 전략임을 설파한다. 그는 자신이 '레비나스의 전문가'가 아닌 '자칭 제자'임을 고백하며, 자신의 해석이 학술적으로 엄밀하지 않을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이러한 태도는 독자에게 해방감을 준다. "오해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 텍스트가 당신의 신체를 통과하여 당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치다의 이러한 접근은 지식의 축적이 아닌 '지혜의 전수'라는 철학 본연의 기능을 회복시킨다.

2. 라캉이라는 열쇠로 연 레비나스의 문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물과 기름'처럼 보일 수 있는 레비나스의 윤리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접목했다는 점이다. 우치다는 두 사상가가 공유하는 '구조적 유사성'을 포착한다. 그것은 바로 '주체의 중심성 해체'와 '타자의 절대성'이다.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의 진입'과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 윤리의 시작'은 모두 "내가 알 수 없는 거대한 타자(게임의 룰/무한) 앞에 나를 굴복시키는 행위"에서 비롯된다는 통찰은 탁월하다. 특히 장량과 황석공의 일화를 통해 '스승의 신발을 줍는 행위'가 곧 '상징계적 주체'로의 도약임을 설명하는 대목은 이 책의 백미다.

3. 홀로코스트 이후,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책임

우치다는 레비나스 철학의 심장부에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비극이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레비나스의 '타자'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아우슈비츠에서 돌아오지 못한 가족과 동포들, 즉 '죽은 자들'이다. "나는 내가 받지 않은 박해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는 레비나스의 절규는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우연히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들 앞에서 느끼는 뼈아픈 죄책감의 발로다. 이 지점에서 철학은 윤리가 되고, 윤리는 진혼(鎭魂)이 된다. 우치다는 우리가 타자를 환대하고 책임져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 정합성이 아닌, 죽은 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소리 없는 명령'에서 찾는다. 이는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와 능력주의가 놓치고 있는 '연대'의 가장 깊은 뿌리를 건드린다.

4. '대역'으로서의 삶: 왜 우리는 선해야 하는가?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왜 우리는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선을 행해야 하는가?"이다. 레비나스와 우치다의 대답은 명확하다. 우리는 '나'이기 이전에 타자(죽은 자/신)의 '대역(Substitute)'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신하여 이 자리에 서 있다. 나의 삶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며, 나를 살게 한 타자들의 희생 위에 성립되어 있다. 따라서 윤리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무한한 빚을 갚아나가는 과정이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Me voici)." 아브라함의 이 대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우리는 타자의 부름 앞에, 고통받는 이웃 앞에,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앞에 응답해야 할 책임을 지닌다. 우치다 다쓰루는 레비나스의 난해한 텍스트를 빌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묵직하게 묻고 있다.

5. 블로거와 콘텐츠 제작자를 위한 필독서

이 책은 단순히 철학 애호가뿐만 아니라, 글을 쓰고 콘텐츠를 만드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쓴다"는 명목하에 텍스트의 깊이를 훼손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타인의 고통을 '콘텐츠'로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는 우리가 타인을, 그리고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블로그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당신에게, 이 책은 진정한 소통이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 그리고 '응답하는 것'임을 일깨워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