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타자, 윤리, 그리고 에로스의 철학
왜 지금 레비나스인가?
현대 사회는 소통의 과잉 시대이면서 동시에 소통의 부재를 겪고 있습니다. '나'의 권리와 '나'의 자유가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시기에,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과 윤리를 강조한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의 철학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강렬한 충격을 줍니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가 쓴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은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레비나스의 사상을 '스승과 제자', '사랑', '가족'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언어로 풀어낸 역작입니다. 이 글에서는 책의 핵심 내용을 상세히 요약하고, 현대인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깊이 있게 분석해 봅니다.
[상세 요약] (The Summary)
1. 저자의 태도: 연구자가 아닌 '제자'로서의 읽기
이 책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는 서두에서 자신을 레비나스의 '연구자'가 아닌 '제자(자칭)'로 규정합니다. 이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인 '타자성'을 받아들이는 인식론적 태도입니다. 연구자가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비평하려 한다면, 제자는 스승의 텍스트를 '완전기호(signes parfaits)'로 간주하고 그 안에 담긴 무한한 예지를 길어 올리려 합니다
레비나스가 탈무드를 해석할 때 "모든 것이 이미 사고되었다"는 전제하에 텍스트에 접근했던 것처럼, 우치다 역시 레비나스의 난해한 텍스트를 "나의 이해를 초월한 지적 차원"으로 상정하고 '목숨을 건 도약'을 시도합니다
2. 타자와 주체: 오디세우스와 아브라함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점은 서구 철학의 전통적인 주체 개념을 비판하는 데 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를 두 가지 여행의 메타포로 설명합니다.
오디세우스적 주체 (전체성): 온갖 모험을 겪지만 결국 고향(이타카)으로 귀환하여 자신의 경험을 '나의 것'으로 통합하는 주체입니다. 이는 타자를 '나'의 세계로 환원하고 소유하며, 미지의 것을 기지의 것으로 만드는 제국주의적 자아입니다
. 아브라함적 주체 (무한): "고향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신의 명령에 따라,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는 주체입니다. 이는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며, 안정을 버리고 무한을 향해 나아가는 윤리적 주체입니다
.
레비나스가 추구하는 것은 아브라함적 주체입니다. 여기서 '타자(Autrui)'는 단순히 나와 다른 사람(다른 자아, alter ego)이 아니라, 나의 이해와 공감을 절대적으로 초월해 있는 '절대적 타자'입니다. 타자는 나의 세계 안으로 포섭되지 않으며, 오히려 나의 권능과 자유에 의문을 제기하며 나를 윤리적 책임의 자리로 소환합니다.
3. 스승과 제자의 현상학: 지(知)의 비대칭성
1장 '타자와 주체'에서 저자가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사제 관계'입니다. 레비나스에게 스승은 '최초의 타자'입니다. 스승은 제자가 결코 다 퍼낼 수 없는 '지의 대양'이며, 제자는 스승의 예지를 훔치거나 소유할 수 없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텍스트에 칼집을 내어 그 향기(레몬의 향기)를 맡을 뿐입니다
이 관계는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평등한 교환이 아니라, 제자가 스승의 압도적인 타자성을 수용하고 경외하는 비상칭적 관계 속에서 진정한 배움이 일어납니다. "스승을 섬긴다는 것은 타자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학습하는 경험"입니다
4. 비관조적 현상학: 후설을 넘어서
2장에서는 레비나스가 스승인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어떻게 계승하고 비판했는지를 다룹니다. 후설의 현상학은 의식의 지향성(모든 의식은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다)을 규명하며 철학적 엄밀성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후설의 현상학이 여전히 '빛'의 은유에 갇혀 있다고 비판합니다.
빛과 시각의 폭력: 서구 철학에서 '안다'는 것은 '본다(테오리아)'는 것과 동일시되었습니다. 빛 아래 대상을 드러내고, 시각적으로 포착하여 개념화하는 것은 대상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행위입니다
. 이는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소리와 청각의 윤리: 레비나스는 시각보다 '청각'을 우위에 둡니다. 타자는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나에게 '말을 거는 자'입니다. "그대, 살인하지 말라"라고 호소하는 타자의 얼굴은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윤리적 명령(음성)으로 다가옵니다.
비관조적 지향성: 후설이 사과나무나 주사위 같은 관조적 대상을 예로 든 반면, 레비나스는 '사랑받는 사람'이나 '책'과 같은 비관조적 대상을 현상학의 주제로 삼습니다.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파악을 끊임없이 미끄러져 나갑니다. 이것이 '의미작용(signifiance)'이며, 고정된 의미가 아닌 의미 생성의 운동입니다.
5. 집과 여성: 내면성의 탄생
3장 '사랑의 현상학'은 이 책의 백미이자 가장 논쟁적인 부분입니다. 레비나스는 주체가 세상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물러설 곳', 즉 '내면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내면성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바로 '집(Maison)'이며, 집의 본질은 '환대'입니다.
여성적인 것(Le féminin): 레비나스는 이 환대의 주체를 '여성적인 것'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여성을 생물학적 성(sex)이나 사회적 성(gender)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자신을 비워 타자를 맞이하는 존재론적 기능'을 의미합니다
. 수축과 환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신이 자신을 수축(침춤, Tsimtsum)하여 공간을 내어주었듯이, '여성적인 것'은 주체가 거주할 수 있도록 자신을 수축하여 집이라는 내면의 공간을 만듭니다. 남성적 주체(활동하고 노동하는 자)는 이 여성적 환대에 힘입어 비로소 안식을 얻고, 다시 세상으로 나갈 힘을 얻습니다.
비판에 대한 변호: 시몬 드 보부아르나 뤼스 이리가라이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레비나스가 여성을 남성의 보조적 수단이나 내재성에 가두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우치다 타츠루는 이를 '전언철회'의 전략으로 해석합니다. 레비나스에게 '여성'은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먼저 자기를 비우는 '윤리적 선구자'이며, 오히려 남성보다 더 근원적인 주체성을 담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
6. 에로스와 번식성: 자아의 초월
레비나스의 에로스(사랑)는 두 사람의 융합이나 하나 됨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자와의 차이를 확인하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한 운동입니다.
애무(Caresse): 애무는 대상을 소유하거나 파악하려는 손짓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파악하지 않는" 행위이며, 끊임없이 도망가는 타자의 미래를 향한 탐색입니다
. 사랑은 채워짐으로써 끝나는 욕구(Need)가 아니라, 채워질수록 더 깊어지는 욕망(Desire)입니다. 번식성(Fecundity)과 아들: 에로스의 끝에는 '아이(아들)'가 있습니다. 아이는 '나'이면서 동시에 '타자'인 존재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소유할 수 없지만, 아이는 부모의 존재를 이어갑니다. 레비나스는 이를 통해 죽음이라는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진정한 시간의 초월, 즉 '무한'을 발견합니다. "나는 나의 아이 안에서 타자가 된다"
. 이것이 바로 번식성이며, 닫힌 전체성을 깨뜨리고 무한한 미래로 나아가는 윤리적 사건입니다.
7. 찢어진 주체와 성숙
레비나스가 말하는 인간은 "하나이면서 둘인 존재", 즉 "찢어진 존재"입니다
이 분열과 긴장을 견디는 것이 바로 인간다움입니다. '성숙한 인간'이란 신이나 역사, 혹은 전체성 뒤에 숨지 않고,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Me voici)"라고 응답하며 타자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의 철학이 난해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우리가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타자를 어떻게 대하고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사랑의 현상학'임을 역설하며 책을 맺습니다.
[서평] (Book Review)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 우치다 타츠루가 안내하는 레비나스의 세계
"우리는 왜 타인에게 책임을 느껴야 하는가?"
현대 사회는 이 질문에 대해 "계약 관계니까", "상호 이익을 위해서", 혹은 "법이 정했으니까"라고 답한다. 하지만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는 우리가 타인에게 책임을 지는 이유는 우리가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주체'로 성립하기 이전부터 이미 타자의 볼모로 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급진적이고도 숭고한 윤리학을 일본의 거리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특유의 명쾌하고 따뜻한 필치로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가져온다.
난해함의 장벽을 넘는 '오독'의 힘
레비나스의 철학은 어렵다. 『전체성과 무한』이나 『존재와 다르게』 같은 그의 주저들은 철학 전공자들에게조차 에베레스트산과 같다. 그러나 우치다 타츠루는 이 책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에서 학문적 엄밀함이라는 강박을 내려놓는다. 대신 그는 '사랑에 빠진 제자'의 마음으로 스승의 텍스트를 읽는다. 그는 "오독할 권리"를 주장하며, 레비나스의 철학을 자신의 신체적 감각과 생활의 언어로 번역해낸다.
이러한 접근은 놀랍게도 레비나스 철학의 본질인 '타자성'과 맞닿아 있다. 텍스트(타자)를 내 지식의 틀(전체성)로 완벽하게 분석하려는 시도는 결국 타자를 살해하는 것이다. 오히려 텍스트의 난해함 앞에서 쩔쩔매며, 그 넘치는 의미를 받아들이려 애쓰는 수동적인 태도야말로 가장 윤리적인 독서라는 것을 저자는 몸소 보여준다.
'봄(Seeing)'의 폭력에서 '들음(Hearing)'의 윤리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시각 중심의 서구 지성사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는 "알겠다(I see)"라고 말하며 대상을 파악하고 소유하려 한다. 그러나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를 빌려, 진정한 관계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타자의 얼굴은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이 목소리는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헐벗고 약한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의 이기적인 자유에 제동을 건다.
저자는 이를 '집'과 '여성'이라는 메타포로 확장한다. 그가 해석하는 레비나스의 '여성성'은 페미니즘의 비판 대상이 되었던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빛나는 광장에서 물러나 자신을 수축시킴으로써 타자가 거할 공간을 마련해주는 '창조적 환대'의 주체다. 이는 젠더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타인과 공존하기 위해 가져야 할 근원적인 마음가짐을 일깨운다. 내가 한 걸음 물러서지 않으면, 타자가 존재할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
결국 이 책이 향하는 곳은 '성숙'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를 읽는다는 것은 "자기의 기원이 자신 안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 내 성취, 내 존재가 오롯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타자들의 환대와 희생, 그리고 가르침 덕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안락함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 정해진 답을 찾기보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 이것이 레비나스가 꿈꾸었고 우치다 타츠루가 전하려는 '어른'의 모습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기적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은 차가운 분석의 책이 아니라 뜨거운 고백의 책이다. 저자는 레비나스의 철학이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홀로코스트라는 야만적 폭력을 겪은 후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려 했던 처절한 기도였음을 상기시킨다.
사랑은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향해,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 손을 뻗는 행위다. 이 책은 우리에게 안전한 '나'의 세계를 깨고 나와 타자라는 무한한 신비 속으로 뛰어들라고 권유한다. 그곳에 상처받을 위험이 있을지라도, 바로 그곳에 구원이 있음을 역설하면서 말이다. 지금, 관계의 피로함 속에서 혐오와 배제로 치닫는 우리 사회에 이 '사랑의 현상학'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