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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의 큰 물줄기』(진지훈) 리뷰/요약


 

📚 '장로교회의 큰 물줄기' 요약

1. 들어가는 말: 왜 장로회 정치 제도를 알아야 하는가?

저자 진지훈 박사는 이 책이 "안타까움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장로교인, 심지어 목회자들조차 장로회 정치 제도가 칼빈주의의 소중한 유산임을 알지 못하고, 다른 교단의 정치 형태를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침례교식 회중 정치를 따르거나, 반대로 담임목사가 감독처럼 전권을 행사하는 왜곡된 목회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저자는 장로교 헌법의 기원과 역사를 아는 것이 장로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목회자로서 교회를 "장로교회답게" 목회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장로회 정치 제도가 여러 교회 정치 제도 중 하나가 아니라, 성경에서 유래한 사도적 전통이자, 종교개혁자 칼빈이 재정비한 개혁교회의 핵심 유산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 장로교회 헌법은 잉글랜드의 웨스트민스터 헌법(1643-49)에 기초하며, 이 웨스트민스터 헌법은 존 칼빈이 만든 제네바교회 법령(1541)을 근간으로 합니다. 또한 이 법령은 스코틀랜드 치리서에도 영향을 주었기에, 장로교 헌법의 원류는 칼빈의 제네바교회 법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이 "큰 물줄기"를 성경 시대부터 오늘날 한국에 이르기까지 추적합니다.

2. 장로 제도의 성경적 기원

저자는 장로 제도가 "모세와 사도행전 때 일찍 있던 성경적 제도"라는 헌법 총론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 성경적 기원을 구약과 신약에서 찾습니다.

1) 구약적 기원

장로 제도는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통치 형태로, 경험 많은 연장자가 통치자를 돕는 방식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요셉 시대 애굽 궁에도 장로(원로)들이 있었음이 언급됩니다 (창 50:7).

이스라엘에서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출 3:16) . 이 장로들은 백성의 대표로서 모세와 백성 사이의 소통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받아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운 것(출 18:25)은 , 교인 중 유능한 이를 장로로 뽑아 이끌게 하는 장로 제도의 원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구약 시대부터 '장로 제도'라는 틀을 통해 백성을 다스리셨습니다.

2) 신약적 기원

구약의 장로 제도는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까지 이어졌습니다.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은 이 제도에 익숙했고, 예수님 승천 후 교회를 조직할 때 자연스럽게 유대 사회의 장로 제도를 벤치마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지(루스드라, 이고니온 등)를 떠날 때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리더십을 위임했으며(행 14:23), 디도에게도 그레데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딛 1:5).

'장로회(Presbytery) 제도'의 핵심은 단순히 치리 장로를 뽑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장로'(목사)와 '다스리는 장로'(치리 장로)를 포함한 모든 장로들(presbyters)이 대등한 자격으로 회의체(치리회)를 통해 교회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치리회의 모습은 신약 성경에서도 발견됩니다.

  • 디모데는 "장로의 회(πρεσβυτέριον)"에서 안수받았습니다(딤전 4:14). 이는 오늘날 노회와 같이 장로들의 회의체를 통해 목사 안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 사도 요한은 스스로를 '사도'가 아닌 '장로'(πρεσβύτερος)라고 칭했습니다(요이 1:1, 요삼 1:1).

  •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는 장로회의 전형적인 모습, 즉 오늘날의 노회나 총회와 같습니다. 이 회의는 안디옥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집되었습니다. 만약 이 회의가 장로회의가 아니었다면 사도들(베드로 등)의 사도적 권위로 즉시 종결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는 사도들 외에 바리새파 출신 장로 등 여러 장로가 대등하게 발언했으며(행 15:5), 최종 결정은 사도 베드로가 아닌 예루살렘교회의 장로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그 결정(규례)은 안디옥교회뿐 아니라 바울이 순회하던 모든 교회에 전달되었습니다(행 16:4). 이는 이 회의가 단순 자문이 아닌, 모든 교회가 따라야 할 것을 결정한 '장로 회의'였음을 증명합니다.

3. 존 칼빈의 제네바교회 법령 (1541년)

오늘날 모든 장로교회 정치 제도의 근간은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1541년 제네바교회를 위해 만든 교회법입니다.

1) 16세기 종교개혁과 칼빈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로마교회 법령을 따르지 않게 된 개혁교회들은 새로운 교회법이 필요했습니다 . 칼빈은 신학뿐 아니라 법학(시민법, 교회법)을 공부한 법학도였습니다. 이 훈련은 그가 종교개혁 이후 교회를 위한 법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네바는 칼빈이 도착하기 전인 1536년 5월, 이미 종교적으로 로마교회와 결별을 선포한 상태였습니다.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이 이 개혁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1536년, 스트라스부르크로 가던 칼빈이 제네바를 경유하자, 파렐은 그에게 강력히 남아줄 것을 권했습니다.

칼빈의 첫 사역(1536-1538)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칼빈은 교회의 치리권이 시의회가 아닌 교회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시의회는 목사를 단순 설교자로만 보았고 교회를 독립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갈등으로 칼빈과 파렐은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3년간(1538-1541) 머물며 프랑스 난민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마틴 부처(Martin Bucer)의 교회 법령을 벤치마킹하며 자신의 생각을 체계화했습니다. 그 사이 제네바는 칼빈이 떠난 후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시의회는 칼빈에게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2) 1541년 '제네바교회 법령'과 4가지 항존직

1541년 9월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즉시 그가 작성한 교회법 초안을 시의회에 상정했습니다 . 이 법령의 서문에서 칼빈은 교회의 4가지 필요 요소를 지적하며, 이를 위해 4가지 직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4가지 직분을 '항존직(恒存職)'이라고 부릅니다. 저자는 이 용어가 '한 번 임직 받으면 죽을 때까지 유지되는 종신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한 교회 안에 항상(恒) 존재(存)해야 하는 직분'이라는 뜻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칼빈이 제정한 4가지 항존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목사 (Pastor): 제네바교회 법령의 첫 번째 직분입니다. 주된 임무는 ① 하나님의 말씀 선포, ② 성례 집행, ③ 장로들과 함께 권징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직분을 감독관(bishop), 장로(elder) 등으로도 불렀으며, 교회의 모든 공식 업무를 총괄하는 총감독자(superintendent)로 보았습니다.

  2. 교사 (Teacher): 다른 이름으로 박사(doctor)라고도 불렸습니다. 주된 임무는 건전한 교리를 가르쳐 순수한 복음을 유지하고, 사람들이 잘못된 교리에 오염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신학교육뿐 아니라 대학 교육, 어린이 공교육 시스템의 모든 교사까지 이 직분에 포함되었습니다.

  3. 장로 (Elder): 목사의 별칭으로서의 장로와는 구분됩니다. 주된 임무는 ① 각 성도들의 삶을 돌아보는 것, ② 잘못을 행하는 이들을 부드럽게 권면하는 것, ③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을 목사회(당회)에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장로들은 시의회 의원 중에서 선출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습니다.

  4. 집사 (Deacon): 사도행전 6장에 근거합니다. 제네바에는 두 종류의 집사가 있었습니다. ① '프호큐러흐(procureurs)'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제를 담당했으며, ② '오스삐탈리에흐(hospitaliers)'는 병든 자를 돌보고 음식을 제공하는 일(오늘날의 사회복지사 역할)을 맡았습니다.

칼빈은 이 4가지 직분이 계급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른 사명의 차이라고 보았습니다.

3) 제네바교회 법령의 영향

칼빈의 이 4개 항존직 중심의 교회 정치 원리는 16~17세기 유럽의 개혁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랑스 개혁교회(1559) , 네덜란드의 벨직 신앙고백서(1561), 스코틀랜드 총회(1581), 그리고 잉글랜드의 웨스트민스터 총회(1644)가 모두 칼빈의 시스템을 채용하거나 그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교회법을 확립했습니다. 이 법령은 오늘날 전 세계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4. 스코틀랜드 교회 법령

칼빈의 제네바 법령이 상회(노회, 총회) 개념이 미약했던 단일 도시 시스템이었던 반면,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 정치가 범국가적 조직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1)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낙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주역은 존 낙스(John Knox)였습니다. 그는 로마교회 신부였으나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세인트 앤드류 성 농성 사건으로 프랑스 군에 잡혀 19개월간 갤리선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석방 후 잉글랜드에서 사역했으나, '피의 메리'(메리 튜더)가 즉위하자 박해를 피해 제네바로 망명했습니다.

제네바에서 낙스는 칼빈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네바의 영국 피난민 교회를 목회하며 칼빈의 법령에 영향을 받은 "일반 규례서"(1554)를 만들었고, 이는 훗날 스코틀랜드 개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559년 낙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때, 섭정이었던 메리 드 기즈(프랑스 가문)는 종교개혁을 탄압했습니다. '회중의 귀족들'이라 불린 개혁파 귀족들이 이에 맞서 싸웠고, 섭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프랑스-잉글랜드 군대의 철수(에든버러 조약, 1560)로 1560년 8월, 종교개혁 국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이 국회는 낙스의 주도하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를 통과시키고 교황의 사법권을 폐지했습니다.

2) 스코틀랜드 제1치리서 (1561년)

국회는 교회 정치 문제를 다룰 6명의 위원회(존 낙스 포함, 공교롭게도 6명 모두 이름이 '존'이었음 )를 조직했습니다. 이들이 만든 초안이 1560년 12월 제1회 총회에 "치리서"(Book of Discipline)라는 이름으로 제출되었고 , 1561년 1월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 이것이 '제1치리서'입니다.

제1치리서는 목사, 장로, 집사로 구성된 지교회 치리회(오늘날의 당회)를 규정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당시 목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과도기적인 임시직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 시찰감독 (Superintendent): 스코틀랜드 전역을 10개 구역으로 나눠 , 순회 목회자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목사를 임명할 권한을 가졌습니다.

  • 독경사 (Readers):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 성경과 기도서를 낭독하던 임시직이었습니다.

3)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위기

종교개혁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1561년 프랑스에서 남편(프랑수아 2세)을 잃은 메리 스튜어트 여왕이 스코틀랜드로 귀환했습니다 . 독실한 로마 교황주의자였던 그녀는 왕궁에서 미사를 드렸고, 낙스는 이를 "만 명의 무장 군인보다 더 무섭다"고 비판하며 여왕과 격렬하게 대립했습니다.

메리 여왕이 로마 교황주의자인 단리 경과 결혼하고(1565) , 남편 단리 경의 의문사(1567) 후 주범으로 의심받던 보스웰 백작과 재혼하자(1567)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결국 메리 여왕은 폐위되고 잉글랜드로 망명했다가 처형당했습니다.

4) 앤드류 멜빌과 제2치리서 (1578년)

존 낙스가 1572년 사망한 후, 스코틀랜드는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섭정이었던 모턴 백작이 잉글랜드처럼 주교 제도를 도입하려 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입니다. 그는 제네바 대학에서 칼빈의 후계자인 데오도르 베자(Theodor Beza)와 함께 교수로 일하며 제네바의 장로회 정치가 가장 성경적이라는 확신을 가진 학자였습니다. 1574년 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오자, 그는 주교 제도는 사역자 간의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고 비판하며 장로회 정치 도입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1578년 총회장이 된 멜빌은 주교 직책을 폐지하고,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를 통과시켰습니다.

제2치리서의 역사적 의의는 장로교회의 회의체(치리회)에 의한 조직 원리를 명확히 했다는 데 있습니다. 주교제와 달리, 특정 개인(주교, 감독)이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평등한 '회의체'가 교회를 다스린다는 원칙입니다. 이 치리서는 지교회의 당회, 지역의 노회, 전국의 총회 (및 대회)로 이어지는 3심제 치리회(오늘날의 형태)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실제로 적용했습니다.

5. 웨스트민스터 헌법

스코틀랜드에서 완성된 장로교 제도는 잉글랜드의 정치적 격변기를 통해 '웨스트민스터 헌법'으로 집대성됩니다.

1) 잉글랜드의 종교개혁과 청교도 혁명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시작되어 왕이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때 개혁주의 성향의 "39개 신조"가 발표되었지만 , 망명지(제네바 등)에서 돌아온 청교도들은 여전히 교회 안에 남아있는 로마교회의 잔재(제복 착용, 성상 숭배 등)를 폐지하고 주교 제도가 아닌 장로회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1603)하자, 그는 "주교가 없으면 왕도 없다"며 청교도들을 억압하고 스코틀랜드에까지 주교 제도를 강요했습니다.

그의 아들 찰스 1세(1625-1649)는 한술 더 떠,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의 "공동 기도서" 사용을 강요했습니다(1637) .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은 "국민언약"(1638)을 맺고 저항했고, 찰스 1세가 보낸 잉글랜드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이것이 "주교전쟁"입니다.

전쟁 배상금을 물게 된 찰스 1세는 돈이 필요해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했습니다(1640). 하지만 이 "장기 의회"(Long Parliament)는 장로교를 지지하는 청교도들이 다수였습니다. 의회는 왕권을 제한하는 법안들을 통과시키고 아일랜드 반란 진압을 위한 군대 지휘권을 의회가 갖겠다고 선언하며(대항변서) , 잉글랜드 교회의 주교 제도 폐지와 장로회 제도 도입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찰스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의사당에 난입하려다 실패하고,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영국 내란"(청교도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2) 웨스트민스터 총회 (1643-1649)

주교제도 폐지를 결의한 잉글랜드 의회는 새로운 교회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습니다(1643년 7월). 이 총회는 목회자 121명,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 등 총 151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내전 중이던 의회는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이 절실했고, "엄숙 동맹과 언약"(1643)을 체결했습니다. 이 언약은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와 같은 개혁신앙(즉, 장로교 제도)을 채택할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 대표 8명(목사 5, 장로 3)이 총회에 언권회원으로 참석하여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5년 7개월간 거의 매일 모여 토론한 끝에 다음과 같은 문서들을 만들었습니다.

  •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 (1644)

  • 장로회 정치 제도 (1645)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6년 말 확정)

  •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및 소요리 문답 (1648)

3) 총회 결의의 좌절 (잉글랜드)

아이러니하게도, 이 위대한 문서들은 정작 잉글랜드에서는 6개월 만에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의회군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장로교도가 아닌 '독립파'(Independents) 청교도였습니다. 독립파는 장로교 제도 역시 주교제도처럼 개교회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내전에서 승리한 크롬웰은 군부의 힘을 이용해 1648년 12월, 의회에서 장로교 지지 세력을 모두 숙청했습니다(이른바 "잔부의회"). 이 잔부의회는 찰스 1세의 처형을 결의(1649년 1월)하고,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모든 결의안에 대한 법적 효력을 정지시켰습니다.

크롬웰 사후 왕정이 복구(찰스 2세)되자, 잉글랜드 교회는 다시 감독제로 회귀했고(1660년 통일령), 장로교 목사들을 포함한 1,800여 명의 청교도 목사들이 추방당했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이때 감옥에서 저술되었습니다.

이렇게 웨스트민스터 헌법은 잉글랜드에서 버려졌지만, 이미 1647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공식 헌법으로 채택했으며, 찰스 2세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 미국에서 그 생명을 이어가게 됩니다.

6. 미국 장로교회의 설립

1) 신대륙 식민지 개척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전부터 많은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이주했습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탄 "필그림"들은 회중파 청교도였습니다. 이들은 매사추세츠 등 뉴잉글랜드 지역에 정착하여 회중교회 중심의 신정정치를 지향했습니다.

2) 장로교도들의 이민과 웨스트민스터 헌법 수용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후, 크롬웰과 찰스 2세의 박해(1650~1680년대)로 인해 수많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장로교 지지자들이 신대륙으로 대거 이주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독립된 교회 형태를 유지했으나, 점차 연합체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1706년 12월, 프란시스 마키미(Francis Makemie)를 중심으로 7명의 목사가 모여 미국 최초의 노회인 필라델피아 노회(Presbytery of Philadelphia)를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조직 첫해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성경을 잘 요약한 신앙과 생활의 기본 규범으로 삼기로 결의했습니다. 또한 스코틀랜드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장로회 정치 체제를 받아들였습니다.

필라델피아 노회는 10년 만에 4개 노회로 성장하여 1717년 첫 대회를 열었고, 1729년 대회에서는 모든 목사 후보생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교리의 기본으로 고백하도록 결의했습니다.

미국 장로교회는 1789년 16개 노회, 3개 대회로 성장하여 총회를 조직했으며, 1788년 제정된 미국 장로교 헌법은 웨스트민스터 장로회 정치 제도에 근거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로써 웨스트민스터 헌법은 미국 장로교회의 변할 수 없는 신학적 기본 틀로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7.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여러 나라의 장로교 선교사들의 연합 협의체(1889년 장로교공의회)를 중심으로 조직되었습니다.

1901년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었고, 1907년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되었습니다. 이에 맞춰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들과 한국인 장로, 조사들이 함께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를 조직했습니다.

이 노회는 당시 한국에 유일한 장로교 노회였으며(단독 노회), 선교사들로부터 독립한 한국인 노회(Independent)라는 의미에서 "독노회(獨老會)"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1회 독노회는 '12신조'와 '장로회 규칙'을 채택했는데,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직접 가져온 것이 아니라, 당시 선교사들에게 익숙했던 인도장로교회의 신조와 규칙을 수정하여 채택한 것입니다.

1912년, 이 독노회는 7개의 정식 노회(경기충청, 전라, 경상 등)로 재편되었고, 1912년 9월 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이후 1917년 제6회 총회에서 비로소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번역하여 그것을 기초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사용하던 미국 장로교회의 헌법을 많이 참조하고 의존했습니다. (1919년 8회 총회는 헌법 해석에 의문이 생길 경우, 미국 장로교 신학자 핫지(A. A. Hodge)의 "정치문답조례"를 참고서로 사용할 것을 결의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한국 장로교회는 수많은 분열(2018년 기준 286개 교단 )을 겪었지만, 대부분의 교단들은 분열 이전의 헌법, 즉 웨스트민스터 헌법에 뿌리를 둔 헌법을 큰 차이 없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8. 나가는 말 (결론)

저자는 장로회 정치 제도가 단순한 여러 시스템 중 하나가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친 제도이며(구약의 원리, 신약 사도들의 시행), 초대교회 공의회(니케아, 칼케돈 등) 역시 '장로 회의'의 형태였습니다.

이 제도는 중세 로마교회 시대에 교황 1인 독재 체제로 변질되었으나,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제네바교회 법령을 통해 재정비했고,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앙의 선배들이 피땀 흘려 완성도 높은 형태로 다듬었습니다.

저자는 오늘날 한국 장로교인들이 이 제도의 우수성과 성경적,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해 자부심을 갖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이 책을 통해 장로교인으로서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이 값진 유산을 소중히 지켜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책을 맺습니다.



📚 [서평] 장로교회의 큰 물줄기 (진지훈 지음) - "당신이 속한 교회의 뿌리를 아십니까?"

당신은 스스로를 '장로교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왜 하필 장로교인가요?" 혹은 "장로교회는 다른 교회와 무엇이 다른가요?"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많은 교인이 '그냥 부모님 따라', 혹은 '집이 가까워서' 장로교회에 출석합니다. 심지어 교회 중직자나 목회자 중에도 장로교회의 정치 원리가 무엇인지, 왜 이 제도를 따라야 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자 진지훈 박사는 이런 '정체성의 상실'을 안타까워하며 이 책을 썼습니다. 그는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자 미국 칼빈신학교와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16세기 칼빈의 제네바교회 헌법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신학자입니다 .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정치행정'을 가르치는 이 분야의 전문가로서, 저자는 장로교인들에게 "당신이 발 딛고 선 신앙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견고한지" 알려주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큰 물줄기'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이 책의 제목인 '장로교회의 큰 물줄기'는 오늘날 우리가 따르는 장로교 헌법의 거대한 흐름을 상징합니다. 저자는 이 물줄기의 근원이 인간의 고안이 아닌 '성경'이라고 단언하며 책을 시작합니다.

그는 장로 제도가 모세 시대에 이미 백성의 대표를 세우신 하나님의 통치 방식(출 3:16, 18:25) 에서 시작되었으며, 신약 시대 사도들이 유대 사회의 익숙한 이 제도를 채택해 교회를 조직했다고 말합니다. 특히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를 분석하며, 이 회의가 사도들의 일방적인 명령이 아닌, 사도와 장로들이 동등한 '장로'의 자격으로 모여 토론하고 결정한 '장로회의'의 원형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이 물줄기는 중세 로마교회 아래서 교황 1인 독재 체제에 막혀버렸다가,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칼빈에 의해 다시 뚫리게 됩니다. 저자는 이 책의 핵심부에서 칼빈이 어떻게 신학과 법학 지식을 총동원하여 제네바 시의회와의 격렬한 투쟁 끝에(심지어 추방까지 당해가며) 교회의 독립된 치리권과 4가지 항존직(목사, 교사, 장로, 집사)을 골자로 하는 '제네바교회 법령'(1541)을 만들어냈는지 생생하게 추적합니다.

칼빈에서 낙스로, 제네바에서 스코틀랜드로

제네바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스코틀랜드로 흘러가 존 낙스라는 거대한 인물을 만납니다. 저자는 낙스가 메리 튜더의 박해를 피해 제네바로 망명했을 때 "칼빈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으며,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종교개혁을 이끌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책은 스코틀랜드의 두 '치리서'를 비중 있게 다룹니다. '제1치리서'(1561)가 목사 부족이라는 현실적 한계로 '시찰감독' 같은 임시직을 두었던 과도기적 형태였다면, 제네바에서 칼빈의 후계자 베자에게 직접 배운 앤드류 멜빌의 주도로 만들어진 '제2치리서'(1578) 는 주교제를 완전히 철폐하고 오늘날과 같은 당회-노회-총회의 3심제 치리회 구조를 완성시켰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개인이 아닌 '회의체'가 교회를 다스린다는 장로교 정치의 핵심 원리가 확립된 순간이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그리고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이 거대한 흐름은 잉글랜드의 '청교도 혁명'이라는 격랑 속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로 모입니다. 저자는 찰스 1세의 주교제 강요에 맞선 스코틀랜드와의 "엄숙 동맹과 언약" 때문에 잉글랜드 의회가 장로교 제도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하고 이 총회를 소집했다고 설명합니다.

5년 7개월간의 산고 끝에 탄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정치 모범은, 아이러니하게도 올리버 크롬웰(독립파)의 집권과 찰스 2세의 왕정복고로 인해 정작 잉글랜드에서는 버려지고 맙니다.

하지만 이 물줄기는 끊기지 않았습니다. 이미 1647년 스코틀랜드의 공식 헌법이 되었고, 찰스 2세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간 수많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장로교도들에 의해 미국 땅에 뿌리내렸습니다. 1706년 조직된 미국 최초의 필라델피아 노회는 시작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헌법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 이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을 통해 물줄기는 마침내 한국 땅에 닿았습니다. 저자는 1907년 조직된 한국 최초의 '독노회' 를 거쳐 1912년 총회가 조직되고, 1917년 제6회 총회에서 미국 장로교 헌법에 기초한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공식 채택하기까지의 과정을 명료하게 정리합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

1. 장로교 '역사' 입문서로 탁월하다 추천사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쓰였습니다. 복잡한 교회법 조항을 나열하는 대신, 칼빈, 낙스, 멜빌, 찰스 1세, 크롬웰 등 역사적 인물들의 투쟁과 신념,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정치적 격변을 따라가며 '왜' 이런 제도가 만들어졌는지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장로교 헌법을 처음 공부하려는 평신도나 신학생에게 최고의 입문서가 될 것입니다.

2. '장로교인'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심어준다 저자의 가장 큰 바람은 독자들이 "장로교 교인으로서 자부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가 따르는 장로교 제도가 몇몇 사람이 편의를 위해 만든 시스템이 아니라, 성경의 원리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피 흘려가며 지켜낸 '사도적 유산'이자 '개혁교회의 유산'임을 깨닫게 됩니다.

3. 핵심 용어를 명확하게 바로잡아 준다 저자는 본문 곳곳에서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용어들을 바로잡아 줍니다. 대표적으로 '항존직'이 '종신직'이 아니라 '교회에 항상 있어야 하는 직분'을 의미한다는 설명 이나, '장로회'가 단순히 장로를 뽑는 제도가 아니라 목사 장로와 치리 장로가 대등하게 참여하는 '회의체'를 의미한다는 설명 은 신앙의 기초를 단단하게 합니다.

아쉬운 점과 결론

저자 스스로가 "저자 서문"에서 이 책이 강의 자료의 필요 때문에 "급하게" 나오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인지 "부족한 면이 많이 보이며" 다음 출판은 2쇄가 아닌 "개정판"이 될 것이라고 겸손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장로교회의 기원과 역사라는 방대한 주제를 100페이지 남짓한 분량(부록 제외)에 명쾌하게 담아낸 수작입니다.

장로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성도, 특히 교회의 리더십인 목사, 장로, 집사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입니다. 이 책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신학적 대답을 들려줄 것입니다. 장로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신앙의 자부심을 회복하고 싶은 모든 이에게 강력히 추천합니다.